글: 중화유산잡지
현재 요녕성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서학도>>는 송휘종 조길(趙佶)의 "어필화(御筆畵)"이다. 구도와 기법이 모두 정교한데, 구도에서는 전통적인 화조화(花鳥畵)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하늘에 가득히 나르는 학들을 드리고, 궁전지붕을 그려서 나르는 학들을 돋보이게 하였다. 중국회화사상 하나의 대담한 시도였다. 회사기법은 특히 정교하여 그림에 나오는 학들이 각양각색이어서 같은 동작을 취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전체 화면이 아주 활발하게 구성되었다.
북송 정화2년 정월대보름 다음 날(1112년 정월 열엿새날), 수도인 변경의 상공에 갑자기 구름이 나타나서 낮게 단문을 비추었고, 학들이 무리를 지어 궁전의 위로 날아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떠나지를 않았다. 두 마리의 선학(仙鶴)은 양쪽 지붕모서리에 앉아있었다. 변경의 황궁내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며 놀라마지 않았다. 길가던 백성들도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학들도 사람의 뜻을 이해한 것처럼 길게 소리지르며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서북�향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당시 송휘종은 친히 이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상서로운 구름이 선학을 데리고 상서로운 일을 알려주려고 했다고 믿었다. 즉, 국운이 흥성할 징조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바로 붓을 가져오라고 하여, 친히 목도한 광경을 비단위에 그리기 시작했고, 시를 한 수 지어 이 일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런 상서로운 기운도 쇠망해가는 국운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후 15해가 지나서, 1127년에 금나라병사들은 송나라의 수도 변량을 점령하고, 송나라의 백성과 군인은 속속 금나라에 투항한다. 금나라 사람들은 이 방대하고 썩은 나라를 먹어삼킬 수 없게 되자, 그저 92개의 창고에 든 160년간 모아왔던 금은재보, 서화진품등과 휘종, 흠종의 두 황제 및 황족, 신료 3천여명을 데리고 북으로 돌아가버린다. 이때 <<서학도>>는 민간에 유출되어 행방이 묘연하게 된다.
600년후, <<서학도>>는 다시 기적처럼 세상에 나타나고, 청나라정부에 수장된다. 그러면서, 여러 황제들의 사랑을 받는데, 서학도에는 "건륭어람지보" "석거보급" "보급중편" "건륭감상" "가경어람지보" "선통어람지보"등의 도장이 찍히게 되며, <<석거보급(石渠寶笈>>의 속편에 실리게 된다. 청나라황실에 들어오기 전에는 원나라의 호행간(胡行簡), 명나라의 항원변(項元변), 오언량(吳彦良)등이 차례로 수장했었다.
1945년 8월 17일, 부의(溥儀)는 몇 상자의 진귀한 서화와 주보, 옥기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다가 심양을 지나갈 때 인민해방군과 소련군에 체포된다. 이 중요한 문화재는 바로 동북은행으로 보내어져서 보관되게 되는데, 그 안에 <<서학도>>가 들어있었다. 1950년, 겁난을 면한 <<서학도>>등 일련의 청나라궁정에서 흘러나온 서화는 동북박물관(지금의 요녕성박물관)에 보관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른다.
<<서학도>>는 송, 원, 명, 청의 몇대 봉건왕조의 흥성과 몰락을 지켜보았으면서도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으니 역사의 진보이고 수장의 진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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