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활동/山 산이 좋아

2019년 부소산 &부소산성%낙화암&고란사(부여) 1

하루를 일년처럼 2019. 7. 22. 16:04

2019년 7월21일(일)(여행 나들이)

제1페이지 오늘:부여부소산성

제2페이지 내일:낙화암

제3페이지 모레:고란사

2019''7.20일(토)산행

산행:부소산(106m)&부소산성&낙화암&고란사

산악회:재경 과역산악회

주소:충남 부여읍 쌍복리 부소산

시대:고대/삼국시대 . 문화재지정:사적 제5호

건립시기:백제시대 . 성격 유형:산성 유적

 

#제1페이지:부여부소산성

내용:부소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시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황16)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22)경 이미 산봉

우리에 태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부왕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부소산성 삼충사 안에는 백제시대의 충신였던

세분이 모셨져 있고(성충 흥수 계백) 또한 슬픔전설을 간직한 낙화암 백화정 고란사도 있다.


#제2페이지:낙화암

내용:부소산 바위 위에는 백화정 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삼국유사'에 인용한'백제고기'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 이라 하였다고 한다. 어러한 내용으로 보아'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 이였는데 뒷날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백제는 신라와 싸워 패하고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하여 대왕포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 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 이라 하였다고 한다.

 

#*''의자왕은 정말 3천명의 궁녀를 대리고 있었을까?*''#

의자왕의 궁녀였던 3천명의 여성들이 낙화암에서 뛰여내리는

모습이 마치 꽃잎이 훝날리는 것.....3천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고 당시 기록에도 없다.3천명의 숫자는 ''백마강부''

라는 시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것은 문화적 상징어일 뿐......,

 

#제3페이지:부여 고란사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

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이라는 설이 전화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

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였다.지금도 절 뒤에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다.

또한 고란사에는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의에는 낙화암 조룡대 사비성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로 98호로 지정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