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씨(宋 氏)
문헌상으로 172본이 있으나, 오늘날 계통이 확실히 전하는 것은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서산(瑞山)·김해(金海)·남양(南陽)·신평(新平)·야성(冶城)·연안(延安)·청주(淸州)·홍천(洪川) 등 25본가량이 있다.
송씨는 당(唐)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을 시조로 삼고 있으나, 그가 언제 우리나라에 귀화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뒤 7세손 순태(舜泰)의 후손 자영(自英)의 세 아들 중 큰아들 유익(惟翊)이 여산송씨의 시조, 둘째아들 천익(天翊)이 은진송씨의 시조, 셋째아들 문익(文翊)이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송씨는 송주은의 후손이라는 설에는 대부분 이론이 없으며, 여산·은진·진천이 송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여산송씨는 고려시대에 진사를 지낸 유익(惟益 또는 有翼, 攸益)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4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 임유무(林惟茂) 일파를 제거하고 왕실로 정권을 되돌린 공을 세워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翼戴輔理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고 여랑부원군(礪良府院君:여랑은 여산의 옛 이름)에 봉해진 송례(松禮)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뒤 6세손 대에 이르러 원윤공파(元尹公派)·밀직공파(密直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지신공파(知申公派)·정가공파(正嘉公派) 등 5개 파로 나누어졌다.
송씨는 당(唐)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을 시조로 삼고 있으나, 그가 언제 우리나라에 귀화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뒤 7세손 순태(舜泰)의 후손 자영(自英)의 세 아들 중 큰아들 유익(惟翊)이 여산송씨의 시조, 둘째아들 천익(天翊)이 은진송씨의 시조, 셋째아들 문익(文翊)이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송씨는 송주은의 후손이라는 설에는 대부분 이론이 없으며, 여산·은진·진천이 송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여산송씨는 고려시대에 진사를 지낸 유익(惟益 또는 有翼, 攸益)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4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 임유무(林惟茂) 일파를 제거하고 왕실로 정권을 되돌린 공을 세워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翼戴輔理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고 여랑부원군(礪良府院君:여랑은 여산의 옛 이름)에 봉해진 송례(松禮)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뒤 6세손 대에 이르러 원윤공파(元尹公派)·밀직공파(密直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지신공파(知申公派)·정가공파(正嘉公派) 등 5개 파로 나누어졌다.
은진송씨는 여산송씨와 근원이 같으며 자영의 둘째 아들인 천익의 후손이다. 그러나 천익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고려시대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대원(大原)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6대손 유(愉)의 아들로 계사(繼祀)·계중(繼中) 형제가 있는데, 그중에서 계중이 사직공파(司直公派), 계사의 아들 요년(遙年)이 목사공파(牧使公派), 순년(順年)이 정랑공파(正郞公派)로 나누어진 뒤 다시 이 3파가 50여 파로 갈라졌다.
진천송씨는 신라 때 대아찬(大阿飡)을 지낸 순공(舜恭)을 시조로 삼고 있으나, 약 340여 년 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진 인(仁)을 17세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뒤 전서공파(典書公派)·낭장공파(郎將公派)·안성공파(安城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 등으로 갈라졌다.
서산송씨는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지내고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진 자영을 시조로 삼고 있다. 김해송씨는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지내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진 천봉(天逢)을 시조로 삼고 있다. 남양송씨의 시조인 규(奎)는 당(唐)나라 말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경순왕 때 신라에 귀부했다가 신라가 망하자 남양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세계가 확실하지 않아 고려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세보(世輔)를 1세조로 하는 도촌파(道村派)와 시랑(侍郞)을 지낸 공절(公節)을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안서파(雁西派)로 갈라졌다. 문경송씨는 이부전서(吏部典書)를 지내다가 고려말 정국이 혼란해지자 문경으로 낙향한 신경(臣敬)을 시조로 삼고 있다.
신평송씨는 여산송씨의 후손으로 고려시대 봉익대부서운관겸습사도감판관(奉翊大夫書雲觀兼習射都監判官)을 지낸 구진(丘進)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신평에 세거한 송씨는 병화로 족보가 소실되어 계대(繼代)를 밝힐 수 없게 되자 홍천송씨와 신평송씨로 갈라졌고, 같은 신평송씨도 구진을 시조로 하는 계파와 구진의 후손으로 조선 세종 때 순창군수를 지낸 자은(自殷)을 시조로 하는 계파로 나누어졌다. 홍주송씨는 신평송씨와 함께 여산송씨에서 분적한 계통으로 고려말 시중(侍中)을 지낸 뒤 홍주에 세거한 계(桂)를 시조로 삼고 있으나, 그뒤의 계대를 잃어버려 조선시대 별시위(別侍衛)를 지낸 평(枰)을 중시조로 하는 홍주송씨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임(霖)을 중시조로 하는 홍주송씨로 갈라졌다. 야성송씨는 고려 목종 때 간의대부 총부의랑(諫議大夫摠部議郞)을 지낸 맹영(孟英)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연안송씨는 고려말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진 경(卿)을 시조로 하는 연안송씨와 신라 박혁거세 때의 인물이라고 전하는 지겸(之兼)을 시조로 하는 연안송씨가 있다. 청주송씨는 고려시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춘(椿)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그 아들 유충(有忠)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고, 손자인 훤(暄)이 서원군(西原君: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그 뒤의 세계가 확실하지 않아 단종 때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승은(承殷)을 1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19만 6,641호와 인구수 63만 4,345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18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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