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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

하루를 일년처럼 2006. 2. 5. 17:36

                            

 

□ 요 약

무술의 하나로 관절에 거는 수와 급소지르기를 특기로 하는 호신술

□ 본 문

약 30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체술( 體術 )로 동양의학에서 다루는 신체의 경락 까지도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매우 짜임새 있는 무술이었음을 짐작할수있다.후일에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수도승의 호신술로 비전 ( 秘傳 )되어왔음.

□ 합기도의 역사적 배경

◈ 고조선부터 있어온 합기도

합(合) : 人 + 一 + 口 의회의문자즉,사람( 人 )과

한(하늘 ㅡ), 땅(口)이 하나로 모인것.

기(氣) : 사람이 갖고 있는무형의 기운을 일으키며,

도(道) : 영어로는 way,즉 천지인( 天地人 )이 하나 되는 수련과정

합기도를 일반인들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고 위험하고 다치기쉬운 무술 또는 중국집 "짬뽕" 음식에다 비유하는 일반무술의 한 종류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사실 합기도는 오랜 전통을 간직한 우리의 고유 무술이다.또한 무술을 흔히 투기종목이라 하는데 인간이 집단 생활을 영위하다 보면 예기치 않는 상대로부터 위해를 받거나 적으로부터 집단적인 침해를 받는수가 있다. 이때 자신과 가족,사회,국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생겨난 공격 및 방어 기술이 결합된 부산물로 이해 하는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부족국가~삼국시대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의 합기(合氣)의 개념은 부족의 단합 과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제례(祭禮)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의식은 하늘을 숭상하던 제례(祭禮)의식이었으며, 이 제례의식을 주관하던 제사장은 부족민(部族民)을 대신해 하늘과의 교감을 이뤄 부족의 평안(平安)과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절대자(神官)로서, 요즘 말하여지는 합기 개념의 선법(仙法)을 사용하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戰國時代)로 접어들어, 합기 개념은 무술(武術) 색채(色彩)를 강하게 띠어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 삼국에 각각 나타나게되며, 지역적(地域的) 특성(特性)에 맞게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高句麗)는 선배제도를 통한 인재등용과 강한 무사정신(武士情神)을 길러 국가 강성(强成)을 촉진하였다. 고구려(高句麗)는 북방(北方)에 위치한 산악지대(山岳地帶)의 지형적(地形的) 특색(特色)으로, 주로 치고(打), 찌르고(突), 차(蹴)는 파괴력(破壞力)이 강한 기법을 사용했으며,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년)에 태학(太學)과 경당의 탄생으로 한층 발전(發展),융성(隆盛)하게 된다.

특히, 맨손 기법인 수박(手搏)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무용총(舞踊塚)의 수박도(手搏圖)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벽화(壁畵)에서 보면 두 사람의 역사(力士)가 등장하여 손 기술(手術)로 보아지는 수법(手法)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그 형세 또한 권술(打,突,蹴)과 체술(折,投)기법의 시초(始初)로 보아진다.

특히, 역사의 체형에서 보듯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하는 격투(格鬪)유형의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각저총(角抵塚)의 씨름도를 보아도 역시 역사들이 등장하며, 고구려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북방계(北方界)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백제(百濟)는 국민 개병제(皆兵制)를 통하여 한층 더 군사력(軍士力)을 강화 시켰으며, 삼랑도(三郞道)를 통해 그 정신을 계승 발전 시켰다. 특히, 속국(屬國)이었던 일본의 궁중무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예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백제의 대좌평(大佐平)등을 일본에 초청하여 일본의 무사들과 겨루었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에게 선진 문화로 백제의 맨손 무예를 지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에는 수벽타라는 기법(技法)이 있었는데 마치 손을 검을 쓰듯이 한다고 하여 쓰인 명칭으로, 인체의 기(氣)를 단전(丹田)에 모아 그 힘을 자유자제로 운용하며 부드러운 원(圓)의 움직임과 흐름(流)으로 상대를 대(對)했으며, 발(足)의 쓰임은 주로 손(手)과 융화(融和)되는 족술(足術)로 가슴아래 부위를 공략하는 하단(下段),중단(中段) 위주의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수벽은 주로 실전위주의 간결하고 실질적인 기술로 여겨진다.


해동운기(海東韻記)에 따르면 옛 풍습에 수술(手術)이 있었는데 마치 칼을 쓰는 것과 같다. 척 장군이 그것을 병법(兵法)으로 가르쳤는데, 두 손이 왔다갔다할 때에 한 구절만 법이 어긋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이 머리에 떨어진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듯 백제 또한 수박(手搏)의 의미로 보아지는 수벽이라는 기법이 전해내려 오고 있었다.

신라(新羅)는 불교(佛敎)국가로 국민을 종교(宗敎)적 이념으로 제도하였으며, 특히 화랑도(花郞徒)는 무사정신(武士精神)의 제도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정신적 육체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화랑(花郞)은 충(忠),효(孝),의(義)를 바탕으로 하는 무사규범(武士規範)이요 무사도(武士道) 이었으며, 이는 풍류(風流)를 기반으로 한 도의(道義)를 수련(修練)하고 가락(歌樂)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수련하였는데,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국선(國仙) 화랑(花郞)은 진흥대왕이 곳 고구려의「선비」제도를 닮아온 지라「선비」를 史譯字로「先人」或 「仙人」이라 쓴다.

「선비」를「신수두」壇前의 競技會에서 뽑아 學問을 힘쓰며 手搏, 擊劒, 射藝, 騎馬, 덕견이,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경기를 하며,遠近山水에 探險하며,詩歌와 音樂을 익히며 공동으로 一處에 宿食한다 라고 기술하였으며, 이는 당시 화랑들이 학문과 더불어 무예 수련을 했음을 알려 주고있다. 또한, 당시에 맨손 기술인 수박과 검술인 격검(擊劒)이 수련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통일신라∼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는 삼국의 무술이 융화(融和)되어 강한 파괴력(破壞力)의 고구려, 실전(實戰)위주의 백제, 부드러우며 정신기법(精神技法)의 신라, 이 삼국(三國)의 기법(技法)이 융화(融和)되어 독특한 발전을 했으며, 경주 석굴암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나 경주 박물관에 있는 동조금강역사상(銅彫金剛力士像)을 보면 역시 역사들 사이에 수박(手搏)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는 전국적으로 무술이 융성(隆盛)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번창(繁昌)한 시기로 보아지며, 삼국(三國)에서 행하여지던 수박이 체계화된 무예(武藝)로서 무인(武人)들 사이에서 성행(盛行)하였다. 그러한 무인(武人)들 중에는 두경승(杜景升), 이의민(李義旼)등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면 이 두 사람의 기록이 매우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 권3(高麗史券三)에, 두경승은 전주 만경현 사람인데 성품이 온후하고 도타우며 꿈임이 적고 용기와 힘이 있었다. 처음 공학군에 들어갔을 때 수박(手搏) 하는 사람이 경승을 불러 한패로 삼았다. 또, 고려사 권36 충혜왕(忠惠王)의 기록에는 1342년 5월 계사(충혜왕3년)에 왕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구경하시었다 , 1343년 2월 기유(충혜왕4년)에 왕이 화비궁에 돌아와서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 임금이 말바위에 납시어 수박희를 보셨다.

그리고, 고려사 권128 결절41에는 이의민은 수박희를 매우 잘 하였다. 의종이 아껴서 대정(隊正)을 삼았다가 별장(別將)으로 승진시켰다 라는 구절이 있고, 수박의 위력에 대하여 이의민과 두경승이 자리를 같이하여 서로 힘 자랑을 하는데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움직였고,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 , 이의민이 의종의 등뼈를 꺽으니 손이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지르는 지라 문득 크게 웃었다 등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회의 수박은 고도로 발달한 맨손 무술인 동시에 체계화된 무예(武藝)이며 또한 고위계급(王家貴族)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성행(盛行)하였으며, 신분상승(身分上乘)의 수단이 될 정도로 매우 중시되는 국가의 무술(武術)이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러, 조선왕조신록(朝鮮王祖新錄)등에 의하면 수박은 군사를 뽑는 정규시험 종목이었다.
병조에서 수박희로 사람을 시험하여 방패군을 보충하였는데 세 사람을 이긴 사람을 뽑아 섰다 , 병조에서 홍인문 안에 무사를 모아놓고 갑사를 보충하였는데 달리기와 수박을 시켜 3인 이상이긴 자를 모두 뽑아서 섰고 , 담양의 향리, 관노 등이 나라에서 수박으로 재주를 시험한다는 말을 듣고 다투어 서로 모여 수박희를 하였다 든가, 기제잡기 권7의 임진록에 금산에서 왜병이 몰려오니 의병들은 무기가 떨어져 할 수없이 맨손으로 수박희로 적과 대결하다가 의병장 조헌도 죽고 영규도 싸움터에서 죽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역시 수박이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국가적으로 군대의 제정비가 필요했던 시절 신분을 초월(超越)해 모든 사람들이 즐겼던 대중적인 경기(競技) 이고 또한 강력한 무술성(武術性)까지 지니고 있는 국방무예(國防武藝)로 까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박(手搏) 은 손수(手) 잡을(박),칠(박)(搏) 이란 어원으로 볼 때 맨손으로 잡는다, 맨손으로 적을 친다. 즉, 맨손으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뜻이요 기술(技術)인 것이다. 이 수박은 한반도의 모든 무술의 모체(母體)요 시초(始初)이다. 이 수박은 근세로 접어들면서 그 명칭(名稱)이 점차 소멸되면서 근대 무술이 대두되는데 그 중에는 택견과 합기술(合氣術)이 나타난다.

합기술을 택견과 비교해 볼 때 유사점과 아울러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택견은 백기신통비각술(백가지 기술 신통한 비각술)/ 경경략과계잠고(가볍게 비녀와 상투를 스쳐)/투화자시풍류성(애인 때문에 싸우는 것도 풍류로운 일)/ 일탈초선의기호(한번 모자를 빼앗으면 의기가 양양) 등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듯 상단공격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족술의 승부를 주로 거는 반면에,
합기술은 신체의 중,하단(中,下段)공격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급소(穴와) 관절을 치고, 꺽고, 던지는 수술(手術)의 승부를 주로 거는 차이가 있으며,
유사점은 그 흐름이 3박자의 흐름과 손과 발의 조화 있는 복합기술(複合技術)그리고 내면적인 화(和),원(圓),류(流)의 조화(彫花)가 유사점이라 할 수 있다.

안곽(安廓)은 <조선무사영웅전(祖先武士英雄傳)>에서 수박희(手搏戱)를 바로 지금의 택견과 동일하게 보았다. 이는 고려 시대에 주로 손 기술에 의존하던 수박(手搏)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발기술에 중점을 둔 탁견으로 발전되었고.. 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1921년에 지어진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탁견희(托肩戱)와 수벽타(手癖打)는 분리되어 한시(漢詩)로 그 동작을 읊은 것이 전한다. 탁견(托肩)은 각술(脚術)이고 수벽타(手癖打)는 수박(手搏) 곧 수술(手術)이라... 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 두 글을 볼 때 안곽의 <조선무사영웅전> 에서는 손 기술에서 발기술의 변화를 탁견(托肩)의 탄생이라고 보고 있으며,
<해동죽지>의 기술은 탁견희와 수벽타로 분리 구분하여 족술(足術)의 탁견(托肩), 수술(手術)의 수박(手搏)으로 구분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손 기술 위주인 합기술(合氣術)의 탄생이라 하겠다.

무엇 때문에 각술(脚術)과 수술(手術)로 분리하였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분명한 것은 각술과 수술은 수박이라는 한 모체에서의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탁견(托肩)과 합기술(合氣術)에서 각 각 손(手)과 발(足)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두 무술은 어원에서 나타나듯이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합기술에서는 기술을 술기(術技)라 칭하고 있으며 족술(足術)과 권술(拳術)을 술기에 내포하고 있는 점, 그리고 형(型)이 없이 실전적 상황에 맞추어 세워진 체계로 미루어 볼 때 실전위주인 백제의 수박을 그 기원(起源)으로 보고있다. 합기술(合氣術)의 역사는 고대 백제의 연보에서부터 나타나며 지금까지 전수되어져 내려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합기술이 현대에 들어서 합기도(合氣道)라는 명칭으로 재 탄생하게 되며, 그 기술(技術)과 기법(技法)이 시절을 지나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현재 우리나라뿐만 아닌 해외에서도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이제는 세계 속의 무도로써, 호신무술(護身武術)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ㅡ현재 작업중입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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