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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冠婚喪祭]

하루를 일년처럼 2006. 8. 31. 13:40

 

관혼상제[冠婚喪祭]  :

관례·혼례·상례·제례를 이르는 말

 

⊙ 본문

인간이 사는 데 관혼상제는 빠질 수 없는 일들이며, 유교에 입각한 통치질서가 완강했던 조선시대의 관혼상제는 단순한 의례 이상의 것이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는 예(禮)를 본으로 삼았다. 사례(四禮)에 관한 많은 논란이 항시 있어왔으며, 조선시대 이재(李縡)의 〈사례편람 四禮便覽〉이 발간된 이래 200여 년 동안 법전 저술도 많이 나왔다.

관례는 청소년이 머리에 관을 쓰고 성년이 되는 의식으로 주로 양반계층에서 행해졌고 일반 백성들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여자의 관례는 계례(禮)라 했고 대개 혼례식의 일환으로 혼례 직전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혼례는 결혼식을 말하며 의혼(議婚)·납채(納采)·납폐(納幣)·친영(親迎)으로 구분된다. 의혼은 결혼을 의논하는 절차이며, 납채는 사주 또는 사성(四姓)을 보내는 일이며, 납폐는 신랑집에서 신부집에게 혼인을 허락한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예물을 보내는 절차이고, 친영은 신랑이 처가로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의례이다. 상례는 장례식인데, 유언, 임종, 시신을 바로잡는 수시(收屍),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 머리를 풀고 곡을 하여 초상을 발표하는 발상(發喪), 상을 치르는 장본인들인 상제(喪制)와 옷차림새인 복인(服人), 사람을 뽑아 상례 일을 보게 하는 호상(護喪), 고인을 섬기는 전(奠)과 상식(上食), 부음을 돌리는 부고(訃告), 시신에 입힐 수의(壽衣), 상을 당하고 처음 지내는 제사인 설전(設奠)·반함(飯含)·혼백(魂魄)·염(殮) 등의 절차를 말한다. 조상을 기리는 제례는 크게 시제(時祭)·차례(茶禮)·묘제(墓祭) 등으로 나뉜다.
 
★족보

일족(一族)의 계보(系譜)를 기록한 가계보(家系譜). 중국 후한(後漢)시대에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부터 편찬되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로서는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가 있다. 한국에서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뚜렷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은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이었다. 족보에는 편찬할 때의 서문(序文)과 선조(先祖)·현조(顯祖)의 사적(事蹟)·행장기(行狀記)·묘비문(墓碑文), 현조의 묘(墓)나 조묘(祖墓)의 소재도(所在圖) 등이 기재되며, 또 시조(始祖)부터 현세대에 이르는 일족 전체의 남성성원(男性成員)의 이름·자·호·시호(諡號)·관직 생몰연월일 및 묘의 소재지, 배우자의 성과 본관 등이 기재된다. 다만 여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으며, 남편의 성명·본관 그리고 아들의 이름이 기록될 뿐, 철저한 남계중심의 기록이다. 족보는 현대에 와서는 누구든지 만들어도 되지만, 봉건사회에서는 양반씨족이 아니면 가질 수가 없었는데, 말하자면 양반이라는 증서와 같은 것이었으며, 이것이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전락하여 병역 등이 부과되므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족보 편찬사업이 활발해졌다. 족보에는 시조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일족을 망라한 대동보(大同譜)와 유력한 인물을 파조(派祖)로 하는 일파를 단위로 해서 편찬되는 파보(派譜)가 있다. 대동보의 편찬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씨족(大氏族)인 경우 거의 불가능하고, 따라서 30∼40년마다 편찬되는 파보가 주가 되지만, 이 시조까지의 계보와 각 파간의 계통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 기록이고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사문서(私文書)이지만 공문서의 성격도 지닌다. 족보의 기록을 통하여 자기 조상의 업적을 찾아보고 종중(宗中)의 협동과 상부상조, 그리고 교화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사회통합적 기능도 아울러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족보가 단순히 가계의 기록만이 아니라 종중(宗中)의 단합과 사회적 통합의 기능을 지닌다고 할 때 그것은 오늘날에도 존재의의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에는 족보 안에 사진을 넣거나 한글로 풀어쓰거나 영상자료 형태로 제작하는 등 여러 새로운 양식들이 시도되고 있다.

★혼례
원래 혼인의 혼(婚)자는 혼(昏)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혼례는 어두울 때 행하는 것이 예(禮)였다. 대대례(大戴禮)라는 책을 보면, 관혼(冠婚)은 사람의 시작이라고 했다.
혼인은 곧 인륜(人倫)의 시초라는 뜻이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면, 얼음이 녹으면 농상 (農桑)이 시작되고 혼례를 치르면 사람의 일이 시작된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혼인 제도는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혼인제도의 변천을 보면, 부여(扶餘)에서는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였고, 옥저(沃沮)에서는 돈을 받고 혼인하는 매매 결혼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 고구려에서는 신부의 집 뒤뜰에 서옥(參屋)이라는 조그만한 집을 짓고 사위가 거처 하다가 자식을 낳아 큰 다음에 비로소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한다. 이는 모계 씨족 시대(母系氏族時代)의 유풍(遺風)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를 거쳐 조선조로 들어와서는 유교(儒敎)의 가르침에 의한 혼례가 유가 (儒家)의 예문(禮文)에 따라 행해졌는데 이 당시의 혼인은 남녀 당사자끼리의 결합 이라기 보다 신랑 신부 두 집안의 맺음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서구(西歐)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거의 모두 신식 의식(儀式)에 의한 혼례를 행하고, 혹 전통적인 옛날의 의식을 따르는 혼례라 하더라도 많이 간소화되었다.

★상례
상례는 인간의 죽음이라는 엄숙한 사태에 직면하여 그 사자를 정중히 모시는 절차인 만큼 가장 중요한 예법으로 되어 있으며, 이는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한국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불교와 유교의 양식이 혼합된 상례가 행하여졌으나 고려 말 중국으로부터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들어오고 조선 전기에는 배불숭유(排佛崇儒)를 강행한 영향 등으로 불교의식은 사라지고 유교의식만이 행하여졌다.
《주자가례》는 중국의 풍습을 주로 한 것이어서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대목이 많아 학자들 사이에는 논란이 거듭되었고 한국에 맞는 예문(禮文)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숙종 때 이재(李縡)가 엮은 《사례편람(四禮便覽)》은 상례를 알맞게 만들어 많은 사람이 이에 따랐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례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 지방마다 풍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불교·그리스도교 등의 종교의식에 의한 상례가 혼입되고 매사에 간략화를 추구하는 현대풍조로 인하여 상례도 많이 변모하였다.

★제례
원시시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과 천재지변의 발생을 경이와 공포의 눈으로 보았으며 4계절의 운행에 따른 만물의 생성화육(生成化育)으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음을 감사하였다. 동시에 천(天)·지·일·월·성신(星辰)·산·천(川)에는 모두 신령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여 신(神)의 가호로 재앙이 없는 안락한 생활을 기원하였는데, 이것이 제사의 기원이다. 제사는 인문(人文)의 발달에 따라 일정한 격식을 갖추었으며 이것이 곧 제례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요(堯)·순(舜) 시대에 천신(天神)·지기(地祇)·5악(嶽)·4독(瀆)을 제사한 기록이 《서경(書經)》 《사기(史記)》 등에 실려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윤리 도덕 관념의 앙양과 함께 조상숭배가 크게 성행하여 조상에 대한 제례가 하(夏)·은(殷) 시대를 거쳐 주대(周代)에 확고하게 갖추어졌다.
한국에서 제례의 시초는 부여(夫餘)에서 영고(迎鼓)라 하여 12월에 하늘에 제사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이라 하여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동예(東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 하여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낸 기록이 있다. 마한(馬韓)에는 소도(蘇塗)라는 신역(神域)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천군(天君)이 신을 제사지냈다. 신라에서는 남해왕(南解王) 때에 혁거세묘(赫居世廟)를 세우고 혜공왕(惠恭王) 때에 5묘(廟)의 제도를 정했으며 산천도 제사지냈다.
백제에는 동명묘(東明廟)가 있었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제도를 본떠 원구(丘:천신을 제사지내는 원형의 단)·방택(方澤:지기를 제사지내는 사각형의 단)·사직(社稷)·종묘(宗廟)·능침(陵寢)·선농단(先農壇)·선잠단(先蠶壇)·문선왕묘(文宣王廟:공자의 사당)·마조단(馬祖壇)·사한단(司寒壇:氷神을 모신 단) 등을 설치하고 예절을 갖추어 제사지냈다. 그리고 명산·대천·우사(雨師)·운사(雲師)·뇌사(雷師) 등도 제사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원구와 방택만을 제외하고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사가(私家)의 제례는, 고려시대에는 대부(大夫)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品)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만을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지내게 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를 두어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종약원(宗約院)이 거행하는 종묘의 제향,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 유림(儒林)이 거행하는 문묘(文廟)의 제향, 유림이 거행하는 각 서원의 제향, 사가의 조상 제사 이외의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