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공주 이야기 -평강공주, 선화공주, 요석공주, 노국대장공주- | |
updated :
2005.09.27 |
온달과 사랑한 평강공주, 마동이(薯童)와 사랑한 선화공주, 원효를 사랑한 요석공주 그리고 공민왕을 사랑한 노국대장공주... 우리 역사에서 이 만큼 가슴 짠한 공주님들의 러브스토리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비롭다.
이 네 공주는 결코 잘생기고 힘 있는 남자를 얻기 위해 자신의 미모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소극적인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나름으로 격동의 역사와 연대하려 한 대단한 용기와 의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들 공주들과 사랑한 사람은 대단히 미천하거나 괴이한 남성들이었고 이들은 자기 남자를 엄격하게 단련하거나 그들에게 힘이 되어 훌륭한 일에 나서게 했다. 그런데 네 공주의 가장 큰 공로는 아마도 지체가 낮거나 광적인 남성과의 연애를 통하여 신분제 사회의 경직성을 풀고 독점 사회의 일각을 무너뜨린 점이다. 실제로 네 공주는 모두 각 국의 독점적 귀족세력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독점에 대한 반발의 당사자였다. 즉, 공주들은 소수의 지배부족과 그 소속 남성만이 모든 권력을 쥐고 죽어서도 극락을 독점하는 시대에 저항하고자 했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대부분 미국과 영국에서 창출한 제국주의적 여성관의 결정체인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이야기에 취해 산다.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도 결국은 노력보다는 씨나 혈통이 중요하다는 괘씸한 부르주아적 동화이다. 이 이야기들은 늘 공주는 착하고 예쁘고 마음씨도 곱다고, 백마를 타고 온 왕자님이 미운오리인 공주에게 백조의 날개를 달아 준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려울 때 구해 주는 흑기사로 ‘백마 탄 왕자’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도대체 공주가 하는 일이라고는 독이 든 사과를 조심하거나 신발을 잘 벗거나 혹은 그저 왕자 꽁무니를 잘 따라다니는 일뿐이다. 이들과 우리의 공주님을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런 백설공주 덕분인지 오늘날에도 여성의 미모는 멋진 왕자를 유혹하는 최고의 무기이자 마치 하늘의 복인 것처럼 뵌다. 결혼 시기가 다가올수록 자신을 왕자인 양 착각하고 싶은 부르주아 청년들은 미친 듯이 미모를 향한 안테나를 높이 세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여성의 미모는 그녀의 남자만이 감상하고 아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자가 다른 남성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 여자의 미모를 이용하고 있다는 측면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고로 미인은 박복(薄福)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서 미인박명(美人薄命)이나 미인박복(美人薄福)이란 말은 대부분의 미인들이 신데렐라처럼 혹은 춘향이처럼 남자 덕분에 신분을 상승하기는 고사하고 이용만 당한 나머지 그 곱던 청춘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사정을 집약한 말이다. 그런데 역사를 위하여, 민중을 위하여 애쓴 우리의 네 공주들도 참으로 박복(薄福)하였다. 명작 동화에 나오는 백설공주와 달리 너무도 힘들었던 우리의 공주들... 하지만, 똑같이 박복해도 우리 공주님들은 역사와 나라를 위해 그러한 아픔을 이겼다는 점이 잡스런 공주들과는 다른 점이다.
고구려의 평강공주는 아버지 평원왕의 만류에도 요즘 같으면 형편없는 날라리인 온달과 결혼하였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이던 전통 5부족이 권력을 농단하던 고구려 조정에서 그녀의 행동은 참으로 기이했을 것이다. 바보 온달과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전통적으로 가졌던 공주로서의 기득권들이 허공으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어쩌면 한강유역 회복전쟁 당시 아차산성(지금의 워크힐 근처) 싸움에서 남편 온달이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은 일이다. 온달의 공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그의 관이 공주가 오기 전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유명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노국공주의 비운도 평강공주 못지않다. 고려 말 공민왕은 100여 년에 가까운 몽골지배와 침략에서 벗어나고자 분연히 일어났다. 공민왕은 교묘한 공작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고(1356) 고구려 이후 처음으로 요동 땅에 진군하여 고려의 깃발을 꽂았다(1370).
당시 하찮은 서열의 몽골 꼭두각시였던 고려 국왕을 왕답게 만든 사람이 바로 노국공주였다. 비록 혈통은 몽골 여성이었지만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벌인 항몽전쟁을 묵인하고 오히려 배원정책을 지원함으로써 친정인 몽골을 배신했다. 아울러 남편이 제대로 고려의 왕이 될 수 있도록 그를 지원할 신흥개혁세력 신돈을 연결하여 국내의 모순을 개혁하도록 했다. 따라서 혈통이 다르더라도 우리 역사와 함께 한 노국공주는 우리의 조상인 것이다.
그녀의 요절은 개혁 군주 공민왕의 마음과 이상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기행과 폭음 그리고 온갖 음행을 저지르는 망나니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공민왕은 그의 측근에 의해 암살당한다. 두 사람 사이에 후사가 없었던 것도 참으로 박복한 일이었다. 공민왕은 나중에 신돈의 몸종 출신인 반야(般若)에게서 우왕을 보게 되지만, 훗날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몰아 폐하고 조선왕조 개창을 합리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도 그러했다. 그녀는 서동이 지어 퍼뜨린 노래를 인연으로 그와 결혼하였다. 서동은 본래 전북 익산 마룡지 근처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던 백제 몰락 왕족의 후예로 보인다. 그런 서동이 어떻게 왕이 되고 선화공주까지 얻게 된 것일까.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신라 공주와 백제 왕자의 사랑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결혼은 중원 대륙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기류, 즉 수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과 그 파장에 대비하는 나제 동맹의 의미가 큰 것이다. 아울러 당시 온달 장군을 중심으로 다시 고구려가 남하하여 한강유역을 놓고 신라와 전투를 벌이던 위기 국면에서 익산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둔 무왕 그룹이 신라의 지원으로 백제 왕권을 회복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선화공주는 조만간 다가올 중원의 거대한 홍수와 대륙에서 부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적국의 왕비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언니 선덕여왕이 중국을 칭송하고 진덕여왕이 당나라에 태평송을 바치는 등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온갖 힘을 다 기울이면서 대외적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오히려 백제 무왕(서동)은 공주의 친정인 신라를 수십 번 침략하였다. 선화공주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미륵사 창건을 무왕에게 요청하였다.
한편 태종무열왕의 누이 요석공주도 당시로선 스님인 원효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는 등으로 진골 귀족과 화엄종계나 의상계열 승려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원효가 어떤 여성이 준 생리대를 빤 물을 멋모르고 마셨다는 ‘낙산사 설화’는 그러한 원효와 요석공주의 파계에 대한 당대의 모진 손가락질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요석공주는 귀족에 의해 독점된 극락을 민중에게 해방한 원효대사를 사랑했다. 그와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원효의 아들인 설총을 낳았고, 그 설총은 이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도 문자를 배포, 귀족의 문자 독점을 해방시켰다. 즉, 아버지 원효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로 귀족만의 극락 독점을 깨버린 것과 같이 아들 설총도 이두를 만들어 귀족의 문자 독점을 깨뜨리고자한 것이다. 평강공주, 선화공주, 요석공주, 노국대장공주... 우리 역사를 고운 사랑으로 수놓은 이 아름다운 공주들은 어떤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같이 슬프고 힘든 인생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이 공주들은 결코 역사와 민중을 외면하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각 나라의 중요한 고비에서 중요한 선택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 선택은 대체로 신데렐라처럼 멋진 왕자를 뽑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개혁과 사회적 모순의 타파를 위한 노력이었다. 극락을 민중에게 열게 한 요석공주, 썩은 5부족 독점체제에 반기를 든 평강공주, 나라꼴을 잃은 고려를 다시 재건한 노국공주, 대륙과 북풍 그리고 살육을 잠재운 선화공주 등 우리나라의 고운 공주님들은 비록 개인적으로 박복했지만 소중한 우리 역사의 동반자였다. 이들 공주님들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남성들의 싸구려 돈다발에 현혹되어 인생의 안일을 택하는 신데렐라 보다는 가치 있는 삶에 인생을 투자하는 그런 공주님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지는 못할지라도 박복하지나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래야 역사가 이기는 것 아니겠는가. 정의가 불의에 자꾸 패하니깐 누가 진실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모두들 편한 길로만 가서 편하게 살려고만 하지... | |||||||||||||||||||||||||||
글 : 김인호
교수 사진 출처: 네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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