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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역 오일장

하루를 일년처럼 2006. 12. 27. 10:46

과역 오일장

뻘냄새 그득한 아낙네들의 장

 

-고흥 과역장-
천하주유 

 

여느 장과 분위기가 달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살기 좋다고들 이구동성이다. 시골에서는 좀 체

 

듣기 어려운 말이어서 거짓말인 것만 같다. 전남 고흥군 과역면 5일장 가는 길,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온 바다가 하얗게 일렁거렸다. 길가에는 마늘밭이 지천이었고, 농가 마당의 감나무에

 

서는 연두색 순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 고막 굴 바지락 키조개 쭈꾸미 낙지…. 과역장에 나온
물건들은 뻘에서 나온 해산물 투성이다.

해산물을 종합으로 파는 도상엽(여·66)씨가 “워매매 참말로 고흥지방 같이 따숩고 살기 좋은디가 없어. 해산물 흔하제, 시한에 얼음도 안 얼어… 워매매 참말로 우리는 웃녘 가서 못살아, 추워서.”라며 고흥 자랑을 늘어놓았다. 붉은 다리이 가득 돌게를 담고 나온 한 아주머니가 도씨를 지원했다. “나래도(나로도)는 더 따수와. 겨울에도 언덕에 꽃이 피고, 이파리도 파래갔고 있고, 워매매 참말로 살기 좋아.”

노래 가락처럼 “워매매 참말로”를 활용하는 그이들의 짱짱한 입심이, 고흥이 참말로 살기 좋은 곳이라고 믿게 했다.

과역보다 북쪽에 있는 남양면에 조선시대 벽사역의 하나인 양강역이 있었다. 이 역을 지나왔다 하여 과역(過驛)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흥 북부 6개면 통합 농협 소재지가 있고, 고등학교까지 있는 과역은 고흥 북부 사람들의 ‘문화수도’역할을 해내고 있다. 까닭에 5일장도 “고흥 빼고, 고흥에서 최고 큰 장”이라는 주민들의 말처럼 그 기세가 제법 당당하다.

붕어빵을 파는 김개연(여·46)씨는 “단란주점이 10개가 넘고 다방도 10개가 넘는다”는 말로 과역의 경제력을 자랑했다. 김씨의 끝말이 인상적이었다. “목욕탕도 있다”는 것이다.

여자만과 득량만을 동서로 둔 땅
여자만(여수·순천)과 득량만(장흥·보성)을 동서로 두고,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육지에서 길게 뻗은 고흥은 바다와 육지의 생산력을 모두 끌어안아 예전부

 

터 벌어먹을 것이 많은 곳으로 이야기됐다. 나주·해남과 엇비슷한 9만여명의 인구가 물산이

 

풍족한 땅으로서 고흥을 증거한다. 그렇다고 고흥이 농어촌의 위기를 피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산물이 풍부해 그 속도가 느릴 뿐 인구는 해마다 줄고 있는 실정이다.

 

 

2개읍 14개면의 고흥 땅에서 과역면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은 5천여명. 과역면은

 

득량·여자만을 양쪽으로 동시에 거느리고 있으며, 풍양·금산·도화·포두면과 더불어

 

사람 많은 면으로 분류된다.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과역장 역시 도로변 난장과 장옥으로 나뉘었다. 장옥으로 가는 길 입구

 

는 고막·굴·바지락·키조개·주꾸미·낙지·돌게 등 뻘에서 나온 해산물 투성이어서 봄바람마저

 

비릿해졌다. 호객을 하는 ‘붉은 다라이 아낙’들의 말에서조차 골쾌한 뻘냄새가 났다.

 

뻘을 한번 뒤집어 써야 장옥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듯이, 입구는 어떤 제의의 통과의례

 

장소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경우 장옥 장사가 기우는 것에 반해 과역장의 장옥은 그 기세가 난장에 밀리지

 

않았다. 온통 땜질 투성이로 한참이나 허름한 장옥이지만 빈 점포 하나 없이 상인들이

 

눌러 앉아 거래를 하고 있었다. 신발 좌판을 벌인 60대의 사내는

 

 “테레비에도 나오고 안 그랍디여, 재래시장 살린다고. 선거 끝나고 새로 짓는다요.”라며 묻지

 

도 않은 장옥의 허름함을 변명했다. 과역면 관계자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선거 기간

 

 후로 날짜를 잡았다”며 “금년 중으로 장옥 현대화 사업을 마무리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개의 경우 장옥 현대화 사업이 옛 장옥의 고즈넉한 느낌만 없앨 뿐인데, 지나치게 낡고

 

헝클러진 과역면 장옥은 어쨌거나 새 손질이 필요해 보였다.

▲ 온통 땜질투성이인 허름한 장옥. 그러나 빈 점포 하나 없이 상인들이 눌러 앉아 활기를 띤다.

거리 난장에 밀리지 않은 장옥의 힘


장옥 두 칸을 월 3800원에 임대해 모자장사를 하고 있는 김상철(남·51)씨는 벌교 사람이다.

 

김씨는 “과역장 물건은 다 벌교에서 댄다”며 ‘벌교의 힘’을 강조했다. 꼼꼼히 물으니

 

“모든 물건은 아니고 주로 공산품을 벌교 사람들이 판다”고 한 발 물러섰다.

 

벌교장과 과역장은 각각 4·9, 5·10일로 하루 새다. 고흥장이 벌교장과 같은 날인 4·9일. 벌교와

 

고흥이라는 두 큰 장 사이에 과역장이 선다. 지리적으로도 과역은 고흥과 벌교 중간쯤에 있다.

 

 과역과 벌교 사이에 동강면이 있는데, 1·6일에 장이 들어선다. 5일의 순환주기 중 보통 3일

 

동안 장을 돌고, 나머지 이틀이 물건을 떼는 등 휴지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 장돌뱅이들이

 

 걸었던 길은 고흥(벌교)→과역→동강 순이었을 것이다.

 

과역장은 여전히 제 역할을 튼실하게 해내고 있는 시골장으로, 보기 드문 경우다. 그렇더라도

 

예전보다 그 규모가 준 것은 어쩔 수 없다. 짧아진 도회지 길과 시골에까지 들어선 마트가 5일

 

장의 독과점 지위를 나눠 갖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산중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재류는

 

없었다. 신발 모자 옷 그룻류 등의 공산품과 뻘에서 나오는 어패류, 그리고 약간의

 

육지 산물이 과역장을 지키고 있었다.

 

기울어 가는 장이라도 오후 3·4시까지는 살아 있기 마련인데 과역장은 점심을 즈음해서

 

파장분위기로 넘어가는 모양이 독특했다. 바닷가 사람 특유의 생활습성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이들은 과역장을 ‘오전장’이라고 불렀다. 육지 장보다 2∼3시간

 

빠른 신새벽에 장이 서고 그만큼 빨리 문을 닫는 장이다.

 

누군가 그랬던 것도 같다. 여인들이 살기 좋다고 하거나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면,

 

그곳이 살만한 곳이라고. 과역장은 아낙네들 세상이었고, 골목에는 뛰놀고 군것질하고

 

만화보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는 저만치 밀려나 검은 속살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슬로모션처럼 움직이며 무언가를 캐고 있었다. 과역장을 지키는

 

진짜 힘은 사람들이었고, 고흥반도의 비릿한 바람과 땅에서 스멀거리는 마늘냄새가

 

그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대주고 있었다.


장에서 만난 사람
-50년 대장장이

“넉넉한 사람이믄 요거 하꺼시여? 먼 얘기를 들을라고, 쯔쯔.”
쇳일 이야기 좀 들려 주랬더니 남루한 꼴 보이기 싫다며 대뜸 화부터 낸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순천에서  20년 정도 일하다 고흥으로 옮겨와 30년 넘게 장터 한 모퉁이를 지키고 있는 대장장이 윤기동(73)씨다.

“옛날에는 겨울에만 일이 없었는디, 지금은 봄에만 일이 있고 여름 가을에도 일이 없어. 폴리는 것이 팽야 농기구들여. 낫 호미 도끼 괭이 쇠스랑 같은 거 말이여.”
윤씨와 인터뷰하는 1시간 여 동안 호미 다섯 자루와 낫 세 자루가 팔렸고, 약 1m 정도 되는 굵은 철근 끝을 날카롭게 갈아주는 ‘수리’ 일이 있었다. 일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점심때가 되면 대장간 문은 닫힌다.

“내가 지금도 건강에는 자신이 있어. 그란디 기력은 떨어지드라고. 젊었을 적에는 서른날이 넘도록 하루 왼종일 계속 일하기도 했는디 지금은 오전에만 해.”
작은 체구인데도 지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쇠를 오리고 펴고 깎는 그의 손길은 마치 종이를 다루듯이 가벼웠고, 또 능숙했다. 전남 동부 중심 도시 순천에서 일제시대 때 대장일을 배웠던 그다. 쇠를 두드리면서 그냥 툭툭 뱉는 말속에 ‘대장장이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순천에서는 일제 때부터 철공조합이 있어 갔고 봄 가을로 화전놀이도 가고 그랬어. 조합이 아조 쌔 갔고 우리들이 천대받는 일은 없었제. 그란디 다른 디를 가봉께 다 하대 받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하드라고. 고흥에 온께 단골네들이 요 일을 해. 보성도 그라고 벌교도 그랬어. 순천에서는 우리들이 기술자였는디….”

윤씨 눈으로 보기에는 ‘기술’도 지역마다 달랐다.
“동부 6개 군으로 해서는 광양물건이 잘 나왔어. 특기가 몇 점 있어. 짜구(망치의 일종)하고 호꾸(포크처럼 생긴 농기구)가 아주 좋았어. 연장이란 것이 보기도 좋고 쓰기도 좋아야 해. 장흥 물건이 꼭 그래. 호맹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격이 있어. 보성하고 거리가 거기서 거긴디도 매무새가 다르드라고. 딴 데는 다 비슷하고.”

같은 기술자들끼리는 늘 하던 이야기라며 윤씨는 스스로 내린 평가의 ‘공정성’을 강조했다. 그런 윤씨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남루가 아니었다. 온 삶을 오직 한 일에만 메달린 자에게서 풍겨나오는 전문가의 기운이었다.


과역장 특산품
-낙지

뻘낙지·바위낙지·세발낙지로 그 종류를 가른다면 고흥낙지는 뻘낙지로 분류된다. 세발낙지 또한 뻘에서 자라기는 마찬가진데 목포·무안 등 서남해안 권역에서만 집중적으로 잡힌다는 특성이 있다.

고흥이 끼고 있는 여자·득량만이 아닌 보통의 남해 바다에서 낙지를 잡았다면 대부분 바위낙지라고 할 수 있다. 뻘낙지보다 딱딱하고 맛도 덜해 그 가치가 높지 않다. 고흥 해안선이 아닌 곳에서도 뻘낙지가 잡히기는 하지만 양이 풍족하지 않다.

세발낙지가 아니면서 뻘의 영양분을 한껏 담은 낙지가 과역장 일대에서 거래되는, 현지인들이 ‘낙자’라고 부르는 낙지다. 맨손으로 잡거나 통발 속에 미끼를 넣어 잡는 방법이 있다. 주요 산지는 득량만 보다는 여자만쪽이다. 세발낙지보다 약간 더 희고, 다리통이 두툼하다.

갯벌에서 나는 해산물 전체가 과역장의 특산물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현지인들은 ‘낙자’를 명물로 추켜든다. 과역면 유해권 총무계장은 “목포, 무안 권역 세발낙지의 명성에 우리 뻘낙지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세발낙지는 점점 희소해져 중국산이 들어오고 있지만 여기 낙자는 5일장에서 그냥 사도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시세와 크기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가격은 마리당 2000∼3000원 선. 세발낙지에 비해 대략 2000원 정도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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