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에 관한 기억
인간은 과거를 ‘낭만’스럽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시간이 지나면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시절이 되는 것이다. 내게 그런 기억 중 하나가 명절이면 신작로 차부에서 서울 전자회사에 다니는 누나를 기다리는 일이다. 세 살 차이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어서 동생들 학비를 대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요된 선택에 의해서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하던 누나는 명절에 학용품, 새 옷을 포함한 시골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내려오곤 했다. 게다가 누나에게서 나는 알 수 없는 도시냄새도 너무 좋았다. 나중에 그 냄새를 시내버스 안에서 맡았다.
또 다른 기억은 세찬(歲饌)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빨래터에서 돼지 잡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다. 특히 돼지를 잡고 난 후 어른 들이 바람을 잔뜩 넣어 주는 오줌보는 최고의 놀이감이었다. 세뱃 돈에 대한 기억이 특별히 없는 것을 보면 세뱃돈을 받은 기억이 그리 없는 모양이다.
설을 앞두고 최고의 세찬거리로는 무엇보다 돼지고기와 해우(김)가 단연 최고였다. 이를 어른들은 ‘세찬’이라고 하는데, 마을주민들이 참여하는 친목계에서 돼지를 잡아 세찬거리를 마련해 부위별로 나누는 것이다. 세찬은 설날 새배 오는 사람에게 차리는 음식을 말하지만, 그 유래를 신라시대부터 찾기도 하는데, 조정에서 신하에게 쌀, 고기, 생선, 소금을 세찬으로 내리기도 하였다.
갯벌에서 구하는 세찬거리
다섯물. 11시 무렵이면 물이 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마음이 급한 마을 주민 몇 명이 벌써 마을 앞 갯가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젊은 여자가 바닷가 석화껍질 더미 속에서 뭔가를 한 움큼 집어서 가리나무와 마른 솔가지 위에 던져 놓고는 4~5분 후에 나뭇가지로 휘저어 바닥에 패댕이를 치더니 까서 먹으라며 건네준다.
자연산 석화구이. 하얀 속살에 김이 모락모락, 짭짤하면서 달콤하고 뜨끈한 국물이 입안에서 맴돈다. 처음 먹어본 맛이다. 옛날에는 가리나무 한 둘금 놓고 석화 한 둘금 놓고, 가리나무 한 둘금 놓고 또 석화 한 둘금 놓고 시루떡 놓듯 그렇게 구워서 먹었다고 한다.
고흥군 과역면 내로마을은 1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다. 김해김씨와 경주정씨가 모여 마을을 이루는 내로마을은 명절마다 마을 앞 개를 터서 세찬거리를 마련한다. 개를 튼다는 말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이용권을 가지고 있는 갯벌이나 바다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용을 제한했던 것을 특정한 시기와 목적에 따라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설 명절을 맞이하여 개를 터 세찬거리인 꼬막을 잡는 이 날은 마을임원회의에서 결정한 양 만큼만 꼬막을 캐야 한다. 주민들에게 '지속가능한 개발'이나 '환경친화적 개발'이라는 말도 필요 없다. 그들의 삶이 지속가능했고 환경친화적이었다.
내로마을은 1500여 평의 꼬막밭이 있다. 이 중 이번 설 대목을 위해서 개를 튼 꼬막밭은 절반으로 일년이면 보름, 추석을 포함해서 세 번 개를 튼다. 설을 사흘 앞두고 튼 개는 마을주민들이 모두 참여했으며, 채취량을 호(戶)당 20kg로 정하였다. 대부분 부녀자들이 나섰고, 일부 남자들도 참여하였다. 호당 정해진 양이 있기 때문에 부부가 나온 경우에 일찍 꼬막을 캐고 나올 것이고, 혼자 나온 경우 시간이 더딜 것이다.
꼬막밭은 개인방천, 마을방천으로 구분된다. 개인방천은 마을 꼬막밭을 육지의 논처럼 마을 ‘호’수로 나누어서 독점적으로 점유하여 필요에 따라 채취한다. 반면에 마을방천은 마을공동 점유로 공동이용하며 개인별 점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내로마을은 개인방천은 없으며 마을방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갯벌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모두 이장, 어촌계장, 반장, 개발위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서 결정한다.
개인방천은 상인과의 거래도 개인별로 거래하기 때문에 갯벌에 나가는 것도 개인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마을방천은 공개입찰을 통해서 상인을 결정하고 갯벌에 들어가는 날도 정해진 날에 들어가야 한다.
197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외지 사람들이 마을에 이사와 갯벌을 이용하려면 쌀로 다섯 가마니나 100여 만 원을 입호금(入戶金)으로 마을에 들여 놓아야 가능했다. 그만큼 바다는 내로 주민들에게 소중한 자원이었던 셈이다.
내로 마을 이장 박종복님의 이야기다.
"꼬막은 일년에 세 차례 트고, 바지락은 봄에 입찰을 봐서 한달에 4~5번 트제. 꼬막은 많이 터야 일년에 세 차례여, 이 앞에 고막밭이 전부여. 왼쪽은 동네에서 폴라고 못잡게 해, 오늘은 오른쪽만 튼 것이제. 꼬막밭이 양쪽 1500ha 정도 될까. 오늘 캐가지고 오는 사람은 대부분 20kg 못되고
반지락은 정해진 만큼 상인하고 입찰을 해서 세 사람이 입찰 봤다 그러면 최고 단가를 쓴 사람이 입찰이 되는 것이제."
오래 되었다고 모두 널배를 타는 것이 아니지
대부분 내로 주민들은 고막을 잡기 위해서 널배를 이용하지만 남자와 여자, 나이가 적고 많음, 널배를 타는 기술의 있고 없음에 따라 갯벌을 이용하는 공간과 작업하는 시간이 달라진다. 널배를 잘 타는 사람은 물이 채 빠지기 전에 미리 널배를 타고 깊은 곳까지 나가서 작업을 한다. 남자들은 허리까지 올라오는 장화 옷을 입고 물속에서 손잡이 오른 키만큼 긴 갈퀴를 이용해서 잡는다.
갯벌에서 꼬막을 잡는 남자들의 일부는 널배 길이에 맞춰 갯벌을 긁는 갈퀴를 변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이가 많거나 널배를 타지 못하는 사람들은 갯벌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고막을 잡는다. 이들은 작업시간도 짧고 채취량도 떨어진다.
바다를 향해 나가면서 고막을 잡던 부녀자들의 널배가 어느 순간에 일제히 머리를 마을으로 돌린다. 머지않아 물이 들어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나오면서 꼬막을 잡아야 한다. 특히 널배를 잘 못타는 사람들은 서둘러 나와야 한다. 널배는 마을에 오래 살았다고 잘 타는 것이 아니다. 처음 타도 잘 타는 사람이 있지만, 용기와 욕심이 있어야 한다. 한번 겁을 내고 못타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못타고 만다는 것이 주민들 이야기다.
널배가 마을을 향하면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양지 쪽에 웅크리고 삼삼오오 모여 있던 남자들은 잡담을 멈추고 리어카, 지게 아니면 빈 몸으로 마중을 나간다. 그나마 좀 미안한 맘이 있는 사람은 멀리 갯벌까지 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갯가에서 끌어 내주는 정도가 남자들이 하는 일이다. 물론 직접 들어가서 고막을 캐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양지쪽에서 갯바닥을 보면서 남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다.
"사람 머리가 싹 여리 돌았그만 마중 가야겄그만. 물이 들면 고개가 이리 돌고 나오면서 잡아오제. 이부자리나 가지고 오제, 화루를 가지고 오든지. 좀 누워 있게. 아직 멀었나보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그만 좀 기다려야제."
남자들은 정치이야기, 어제 TV에서 신발크기 370미리인 사람이 나왔다는 이야기, 최근 백담사에 갔다 온 이야기, 가장 빨리 나오는 주민이 누구네 댁인지 등 이야기를 나누며 자기네 집사람이 어디에서 작업을 하는지 찾고 있다. 그래야 어디로 나오는지 확인하고 마중을 나갈 수 있고 갯벌에서 작업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이 들어오면 남자들은 바닥 안으로 들어가 마중을 가는 사람, 갯벌에 들어가지 않고 가에서 끌어주기만 하는 사람, 처음부터 같이 꼬막을 잡으러 가는 사람 등 다양하다.
"몇 푼이나 된다고 나는 안 가고 안 먹어."
"여자들이나 된게 추워도 할 수 있제.
"들어가서 일하면 그렇게 안 추워, 기다리고 있는 우리가 춥제."
"추운디 그냥 대충하고 나오제, 구사리 먹기 전에 얼른 들어가봐(마중나가)."
쏙, 꼬막, 바지락과 석화
내로마을은 득량만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마을로 바다가 깊지 않고 물의 드나듦이 커 갯벌이 발달해 있다. 덤장(이곳에서는 ‘주목망’이라고 함)을 하는 10여 가구가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들도 주목장에 큰 기대를 하기 보다는 찬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이곳에서는 쏙이 많이 나왔으며, 1990년대에는 바지락과 꼬막, 최근에는 바지락과 석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 많은 주민들이 낙지도 잡지만 생업으로 낙지를 잡는 사람들은 대여섯 호 정도에 불과하다.
70대의 마을주민들은 1940년대 흉년에는 쏙과 옥수수 가루를 버물려서 생계를 이을 정도로 쏙이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쏙은 우리나라 서남해안 모래갯벌에서 살며 조간대의 가장 깊은 60cm까지 들어가 서식한다. 주민들은 이렇게 깊은 곳에 서식하는 쏙을 잡느라 갯벌을 뒤집으면서 바지락의 많은 종패들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80년대 말까지 바지락 종패가 엄청나가 쏟아져 나와 매일 5톤 트럭으로 2대씩 실어 나를 정도로 많이 나왔다고 한다. ‘한새(한 사리, 15일)’에 5~6일 작업을 하는데 채취량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다가 1980년 초반 무렵에는 일정량을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입찰을 통해서 개를 트고 있다. 먼저 상인들을 대상으로 입찰을 하여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가구당 정해진 양을 채취하도록 마을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입찰 전에 상인은 널배를 타고 내로 갯벌에 들어가 바지락이 얼마나 들어 있는가, 상태는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입찰가격을 결정한다. 보통 한 호(가구)에 25키로 정도 채취량이 결정되는데 작년에는 1kg에 2600원 내외에서 입찰이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석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 석화는 성장속도가 좋지만 이곳 주민들은 석화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특히 바지락이 자라야 할 자리에 석화가 자라나면서 바지락의 양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꼬막을 사려고 외지 사람들 3~4명이 기다리고 있지만 파는 사람이 없다. 꼬막을 막 캐고 나온 이장님이 뒷정리를 하면서 몇 마디 거들어 준다.
"꼬막 폴 것이 못된다요(고막을 팔아라고 하지만 팔 것이 없다고 한다). 반지락은 살구꽃 필 때가 최고 여물다고 했는데 알이 찼다는 것이제. 그 시기에 바지락은 많이 하제, 개인이 가고 싶다고 파는 것은 없고, 개인방천이 없어요. 옛날에 반지락 종표가 어마 어마하게 많이 나왔어요. 지금은 안나오고 바지락이나 고막은 자연산, 다른 것은 나온 것도 없고. 파는 것은 반지락이고, 꼬막은 자가 소비용이 크고 옛날에도 꼬막은 입찰 잘 안했어요. 석화는 소소한 양이고 넘길 때만 개를 트고 공동 것이라 개인이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지는 않제. 바지락하고 고막만 바다에서 돈이 되제, 마을기금은 어촌계하고 부녀회에서 만들고 있어요. 고막밭을 팔았다, 그럼 개인별로 나누고 얼마는 마을기금으로 하기도 하제. 입찰할 사람들이 널배 타고 다니면서 감정을 하제. 꼬막이 얼마나 들어 있는가."
바지락에 기대를 걸어본다.
내로 앞 바다는 김양식을 비롯한 해조류양식을 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득량만 일대가 그나마 갯벌상태가 양호한 것은 양식어업이 활발하지 않았고 바닷물의 드나듦에 장애요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흥만방조제와 득량만 방조제가 쌓아져 천혜의 어류 서식지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조류의 흐름을 막지는 않아 내로 앞 바다는 잘 보존되어 있는 셈이다.
금년에는 예년에 비해서 바지락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바다가 깊지 않다 보니 오리떼가 날아들어 바지락을 까먹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물을 쳐서 오리가 앉지 못하도록 막아보지만 이마져도 효과적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내로의 주민들은 금년 봄에 바지락에 기대를 걸고 있다. 바지락은 살구꽃이 필 무렵에 가장 통통하고 육질이 최고에 달한다고 한다. 아마도 봄이면 득량만 일대에서는 널배를 힘차게 밀어대는 아녀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전라도닷컴 (기사출력 2004-01-26 14:18:43)
글 : 김준 mountkj@chol.com 현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연구교수
92년 '소안도'에 갔다 어촌에 빠져버렸다. 늘 바다와 만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