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산송씨족보는 1653년 송희업(宋熙業)이 간행하였다.
여산송씨족보는 1606년에 송언신(宋言愼, 1542-1612)이 처음으로 편찬하여 1610년에 송일(宋馹)이 청주에서 1책으로 간행하였고, 그 뒤에 이를 송희업이 보완, 상하(上下) 2책, 226장으로 편찬하여 1653년에 간행한 것이다.
간행 당시 여산의 월봉사(月峯寺)에 약간을 내려보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653년에 간행된 족보가 또 있을 가능성이 많다.
현전하는 족보 중 17세기 이전 족보가 별로 없는 상태라는 것을 고려하면 1600년대에 간행된 이 족보는 희귀본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시조 송유익(宋惟翊) 이하 19세까지 기록하고 있고, 본편 외에 추록(追錄) 2권이 추가되어 있다.
한 면을 세로로 6칸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고, 적서(嫡庶)는 구분하지만 남녀는 구분하지 않은채 출생순서에 의해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성씨의 경우(딸의 후손) 4대까지 기록하고 있다.
14세까지는 양자 입양 사실이 거의 보이지 않고 14세 이후에야 양자 입양이 기록되고 있다.
기재양식의 이러한 특징은 당시 여산 송씨 문중의 가족제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출생순서에 의한 기록은 조선 초기 족보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17세기 중엽까지도 장자상속제도가 완전하게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와 함께 딸의 후손을 4대까지 기록하는 것 역시 18세기 이후의 족보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남녀 차별이 덜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족보를 통해 17세기 이후에야 양자제도가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사실도 또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