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송씨(礪山 宋氏) 편
◇ 최초족보 |
한국내에 현존하는 모든 송씨(宋氏) 중에서 남양 송씨(南陽
宋氏)를 제외한 여타(餘他)의 송씨는 중국당대(唐代)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여산 송씨(礪山 宋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진사(高麗進士)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에 추봉(追封)된 송유익(宋惟翊)으로 벼슬을 꺼려해 제(弟)인 은진 송씨(恩津 宋氏) 시조(始祖) 송천익(宋天翊))과, 현재의 전북(全北) 익산(益山)의 여산면(礪山面)과 충남(忠南) 논산(論山) 은진면(恩津面)의 경계지점에 은거중(隱居中)에 조정에서 형(兄)은 본관을 여산(礪山), 아우는 은진(恩津)으로 정해 내렸다는 설(說)과, 2세(二世) 송숙문(宋淑文)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호부상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戶部尙書)에 추봉(追封)되고, 4세(四世) 송송례(宋松禮)가 역신(逆臣) 최 의(崔 誼)와 임 연(林 衍)·임유무(林惟茂) 부자(父子)를 주살(誅殺),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종식(終熄)시키고 광종(光宗)을 영입, 왕정을 복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추성익재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翼載輔理同德佐命功臣) 상장군(上將軍) 여양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짐으로 해서 여산(礪山) 또는 여량(礪良), 호산(壺山), 낭산(朗山))으로 하였다는 설이 있다.
송씨는 여산 송씨와 은진 송씨를 비롯해, 서산(瑞山), 진천(鎭川), 야성(冶城), 신평(新平) 등 10여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송씨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
여산의 연혁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의 지역으로 백제 때는 지량초현(只良肖縣)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여량현(礪良縣)으로 개칭되어 덕은군(德殷郡)에 속하였다.
고려 1012년(현종 3)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파천(播遷)할 때 여량을 거쳐 남행했다. 이 지방은 지방 교통의 중심지로써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한 많은 역참(驛站)이 산재하여 있었다,
여산 송씨(礪山 宋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진사(高麗進士)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에 추봉(追封)된 송유익(宋惟翊)으로 벼슬을 꺼려해 제(弟)인 은진 송씨(恩津 宋氏) 시조(始祖) 송천익(宋天翊))과, 현재의 전북(全北) 익산(益山)의 여산면(礪山面)과 충남(忠南) 논산(論山) 은진면(恩津面)의 경계지점에 은거중(隱居中)에 조정에서 형(兄)은 본관을 여산(礪山), 아우는 은진(恩津)으로 정해 내렸다는 설(說)과, 2세(二世) 송숙문(宋淑文)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호부상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戶部尙書)에 추봉(追封)되고, 4세(四世) 송송례(宋松禮)가 역신(逆臣) 최 의(崔 誼)와 임 연(林 衍)·임유무(林惟茂) 부자(父子)를 주살(誅殺),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종식(終熄)시키고 광종(光宗)을 영입, 왕정을 복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추성익재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翼載輔理同德佐命功臣) 상장군(上將軍) 여양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짐으로 해서 여산(礪山) 또는 여량(礪良), 호산(壺山), 낭산(朗山))으로 하였다는 설이 있다.
송씨는 여산 송씨와 은진 송씨를 비롯해, 서산(瑞山), 진천(鎭川), 야성(冶城), 신평(新平) 등 10여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송씨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
여산의 연혁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의 지역으로 백제 때는 지량초현(只良肖縣)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여량현(礪良縣)으로 개칭되어 덕은군(德殷郡)에 속하였다.
고려 1012년(현종 3)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파천(播遷)할 때 여량을 거쳐 남행했다. 이 지방은 지방 교통의 중심지로써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한 많은 역참(驛站)이 산재하여 있었다,
1018년(현종9)
전주(全州)의 속현이 되었고. 1391년(공양왕3) 감무(監務)를 두어 낭산(朗山)·공촌부곡(公村部曲)·피제부곡(皮堤部曲)을 병합하였다.
조선 1400년(정종2) 여량과 낭산을 합하였으며, 1402년(태종2) 여산향교가 창건되었고, 1404년(태종4) 여산현(礪山縣)으로 개칭되었다.
1436년(세종18)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의 외향(外鄕)이라하여 군(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699년(숙종25)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본관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되어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명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곳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정홍명(鄭弘溟)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하여 많은 의병을 모아 청주, 과천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운(漕運)의 거점지로 중시되어 옹포에 덕성창(德成倉), 성당포(聖堂浦)에 성당창(聖堂倉)이 있었으며, 남해에서 서울로 연락되는 함열의 소방봉 봉수대(所方烽峰燧臺)와 용안의 광두원 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는 등 군사상으로 중시되던 지역의 하나였다.
1985년 전주부 여산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여산군이 되었고, 일제시대인 1914년 군면 통폐합시 여산군, 천동면, 천서면, 군내면이 통합되어 여산면이 되었다. 여산면은 익산시(益山市)의 동부에 있으며 면적은 36,64㎢이다.
이거(移居)와 분파(分派)는 다음과 같다.
세(四世) 송송례(宋松禮)가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군부판서(軍簿判書) 평장사(平章事) 낭산부원군(朗山府院君) 송 염(宋 琰)과, 차자(次子)는 시중(侍中) 상호군(上護軍) 낭랑부원군(朗浪府院君)이다.
장자(長子) 송 염(宋 琰)은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송광정(宋匡靖)은 원윤공파(元尹公派), 차자(次子) 중찬(中贊) 송방영(宋邦英)은 밀직공파(密直公派),
삼자(三子) 좌찬성(左贊成) 송원미(宋元美)는 소윤공파(少尹公派)이다.
차자(次子)는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대사성(大司成) 송 린(宋 璘)은 지신공파(知申公派), 차자(次子) 우정승(右政丞) 송 서(宋 瑞)는 정가공파(正嘉公派) 등 이상 5개파로 분파(分派) 전국에 걸쳐 산거(散居)하고 있다
3세(三世)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판 호부상서(金紫光錄大夫 知門下省事判 戶部尙書) 송희식(宋希植)이 서울인 개성(開城)으로 상경(上京), 4세(世) 송송례(宋松禮), 5세(世), 6세(世) 우정승 상호군 여량부원군(右政丞上護軍礪良府院君) 송 서(宋 瑞), 이상(以上) 3세(三世) 출장입상(出將入相)했고, 7세(世) 판사복사(判司僕事) 송인번(宋仁蕃), 8세(世) 서운관정(書雲觀正) 송 지(宋 祉)까지 살았다.
9세(世) 경상병마사(慶尙兵馬使) 송호생(宋虎生)이 경기도 양주(楊州)로 이거(移居), 10세(世) 당진현감(唐津縣監) 송원년(宋元年), 11세(世) 공조참의(工曹參議) 송철산(宋鐵山), 12세(世) 회양부사(淮陽府使) 송자강(宋自剛), 13세(世)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송호의(宋好義), 14세(世) 전력부위(展力副尉) 송 계(宋 桂)까지 거(居)하였으며, 15세(世) 효력부위(效力副尉) 송억상(宋億祥)이 증(曾)외가(外家)쪽인 수륜의 윤동(倫洞)의 산수(山水)가 좋다하여 임진란에 낙남(落南)하여 7대(代)를 세거(世居)하였고 16세(世)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송 윤(宋 玧)의 차자(次子) 송문언(宋文言)은 합천 봉산(鳳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22세(世) 송주한(宋柱漢)이 윤동(倫洞)에서 무진년(戊辰年)(1808)에 현(現) 신파리(新坡里)에 칡과 바위들이 엉킨 곳에 터전을 닦아, 아침해가 일찍 뜨고 양지(陽地)바르다 하여 촌명(村名)을 조양리(朝陽里)로 하여 신기(新基)를 잡았다.
역사상 여산 송씨(礪山 宋氏)는 어느 송씨 못지 않게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하였다, 특히 고려 후기 원종대(元宗代)의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宋禮) 때에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만 상신(相臣) 2명, 왕비 1명, 청백리 1명, 공신 5명,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을 배출했다.
지신공파에서는 송현수(宋玹壽)를
비롯하여 송세림(宋世琳)·송세형(宋世珩) 형제, 송상현(宋象賢)·송상인(宋象仁) 형제, 송성명(宋成明)·송진명(宋眞明) 형제, 그밖에
송인명(宋寅明)·송문재(宋文載) 등의 명신들이 나왔다.
송현수는 단종의 국구(國舅)로서 단종복위운동 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송세림은 문장·서화에 뛰어났고, 송세형은 명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르고, 대사헌, 호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송상현은 임진왜란의 절신으로 유명하고, 송상인은 인조 때 암행어사·부사·관찰사 등을 지냈다. 송성명은 예조·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송진명은 호조·이조·예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송인명은 좌의정에 올라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으며, 송문재는 관찰사·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정가공파에서는 영의정 송 질(宋 帙), 중종의 부마 송 인(宋 寅)과 송문림(宋文琳)·송언신(宋言愼) 등이 나왔다.
송 질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 송 인은 중종의 부마가 되고 도총관(都摠管)을 지냈으며 시문과 서예에 능하였다.
송문림은 성종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송언신은 병조·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 원년 관찰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한다.
원윤공파에서는 송익필(宋翼弼)이 대표적 인물이다. 선조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庶出)이라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여산 송씨의 5파 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남도 고흥(高興), 밀직공파는 경상북도 영덕(盈德), 소윤공파는 전라북도 부안(扶安)·익산(益山), 지신공파는 전라북도 부안, 정가공파는 경기에 주로 밀집해 있다.
2000년 통계청 국세조사에서 여산 송씨 전국 종인수는 7만2763가구에 232,753명으로 송씨의 37%를 차지하며 성씨본관별 순위도 37위였다. 참고로 은진 송씨는 208,816명에 성씨본관별 순위는 40위였다.
여산 송씨는 고령군에 27명, 성주군에 34명, 칠곡군에 47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은진 송씨는 고령군에 97명, 성주군에 114명, 칠곡군에 426명의 종인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엮은이 : 성주군 월항면 덤개, 경산인(京山人) 이재필(李在弼) 본지 편집인
(前 국회사무처 4급 보좌관, 現 대구경북연구원 재직)
조선 1400년(정종2) 여량과 낭산을 합하였으며, 1402년(태종2) 여산향교가 창건되었고, 1404년(태종4) 여산현(礪山縣)으로 개칭되었다.
1436년(세종18)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의 외향(外鄕)이라하여 군(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699년(숙종25)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본관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되어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명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곳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정홍명(鄭弘溟)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하여 많은 의병을 모아 청주, 과천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운(漕運)의 거점지로 중시되어 옹포에 덕성창(德成倉), 성당포(聖堂浦)에 성당창(聖堂倉)이 있었으며, 남해에서 서울로 연락되는 함열의 소방봉 봉수대(所方烽峰燧臺)와 용안의 광두원 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는 등 군사상으로 중시되던 지역의 하나였다.
1985년 전주부 여산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여산군이 되었고, 일제시대인 1914년 군면 통폐합시 여산군, 천동면, 천서면, 군내면이 통합되어 여산면이 되었다. 여산면은 익산시(益山市)의 동부에 있으며 면적은 36,64㎢이다.
이거(移居)와 분파(分派)는 다음과 같다.
세(四世) 송송례(宋松禮)가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군부판서(軍簿判書) 평장사(平章事) 낭산부원군(朗山府院君) 송 염(宋 琰)과, 차자(次子)는 시중(侍中) 상호군(上護軍) 낭랑부원군(朗浪府院君)이다.
◇ 시조묘비 |
차자(次子)는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대사성(大司成) 송 린(宋 璘)은 지신공파(知申公派), 차자(次子) 우정승(右政丞) 송 서(宋 瑞)는 정가공파(正嘉公派) 등 이상 5개파로 분파(分派) 전국에 걸쳐 산거(散居)하고 있다
3세(三世)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판 호부상서(金紫光錄大夫 知門下省事判 戶部尙書) 송희식(宋希植)이 서울인 개성(開城)으로 상경(上京), 4세(世) 송송례(宋松禮), 5세(世), 6세(世) 우정승 상호군 여량부원군(右政丞上護軍礪良府院君) 송 서(宋 瑞), 이상(以上) 3세(三世) 출장입상(出將入相)했고, 7세(世) 판사복사(判司僕事) 송인번(宋仁蕃), 8세(世) 서운관정(書雲觀正) 송 지(宋 祉)까지 살았다.
9세(世) 경상병마사(慶尙兵馬使) 송호생(宋虎生)이 경기도 양주(楊州)로 이거(移居), 10세(世) 당진현감(唐津縣監) 송원년(宋元年), 11세(世) 공조참의(工曹參議) 송철산(宋鐵山), 12세(世) 회양부사(淮陽府使) 송자강(宋自剛), 13세(世)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송호의(宋好義), 14세(世) 전력부위(展力副尉) 송 계(宋 桂)까지 거(居)하였으며, 15세(世) 효력부위(效力副尉) 송억상(宋億祥)이 증(曾)외가(外家)쪽인 수륜의 윤동(倫洞)의 산수(山水)가 좋다하여 임진란에 낙남(落南)하여 7대(代)를 세거(世居)하였고 16세(世)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송 윤(宋 玧)의 차자(次子) 송문언(宋文言)은 합천 봉산(鳳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22세(世) 송주한(宋柱漢)이 윤동(倫洞)에서 무진년(戊辰年)(1808)에 현(現) 신파리(新坡里)에 칡과 바위들이 엉킨 곳에 터전을 닦아, 아침해가 일찍 뜨고 양지(陽地)바르다 하여 촌명(村名)을 조양리(朝陽里)로 하여 신기(新基)를 잡았다.
역사상 여산 송씨(礪山 宋氏)는 어느 송씨 못지 않게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하였다, 특히 고려 후기 원종대(元宗代)의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宋禮) 때에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만 상신(相臣) 2명, 왕비 1명, 청백리 1명, 공신 5명,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을 배출했다.
◇ 충렬사 |
송현수는 단종의 국구(國舅)로서 단종복위운동 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송세림은 문장·서화에 뛰어났고, 송세형은 명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르고, 대사헌, 호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송상현은 임진왜란의 절신으로 유명하고, 송상인은 인조 때 암행어사·부사·관찰사 등을 지냈다. 송성명은 예조·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송진명은 호조·이조·예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송인명은 좌의정에 올라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으며, 송문재는 관찰사·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정가공파에서는 영의정 송 질(宋 帙), 중종의 부마 송 인(宋 寅)과 송문림(宋文琳)·송언신(宋言愼) 등이 나왔다.
송 질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 송 인은 중종의 부마가 되고 도총관(都摠管)을 지냈으며 시문과 서예에 능하였다.
송문림은 성종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송언신은 병조·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 원년 관찰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한다.
원윤공파에서는 송익필(宋翼弼)이 대표적 인물이다. 선조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庶出)이라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여산 송씨의 5파 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남도 고흥(高興), 밀직공파는 경상북도 영덕(盈德), 소윤공파는 전라북도 부안(扶安)·익산(益山), 지신공파는 전라북도 부안, 정가공파는 경기에 주로 밀집해 있다.
2000년 통계청 국세조사에서 여산 송씨 전국 종인수는 7만2763가구에 232,753명으로 송씨의 37%를 차지하며 성씨본관별 순위도 37위였다. 참고로 은진 송씨는 208,816명에 성씨본관별 순위는 40위였다.
여산 송씨는 고령군에 27명, 성주군에 34명, 칠곡군에 47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은진 송씨는 고령군에 97명, 성주군에 114명, 칠곡군에 426명의 종인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엮은이 : 성주군 월항면 덤개, 경산인(京山人) 이재필(李在弼) 본지 편집인
(前 국회사무처 4급 보좌관, 現 대구경북연구원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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