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礪山)은 전라북도 익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여량과 낭산 두현의 합명인데, 여량현은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을 신라 경덕왕이 여량으로 고쳤다. 낭산현은 본래 백제의 알지산현인데 경덕왕이 야산으로 고치고 고려때 낭산으로 하였으며, 1401년(정종 3) 두현을 합하여 여산현으로 고치고 1913년 그일부지역은여산면으로 남아있다.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때 진사로 나라에 훈공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로 추밀원부사에 추증되었다. 문헌에 의하여 그의 선계는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 자영(自英)이다.
그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인유익(惟翊)은 여산송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천익(天翊)은 은진송씨, 막내문익(文翊)은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 모든송씨의 연원을 이룬것으로 전해진다. 은진·진천 송씨와 함께 우리나라 송씨의 가장 화려한 인맥을 이룬 여산송씨는 시조의 아들숙문(淑文)이 고려때 정당문학을 역임했고, 증손송례(松禮)는 충렬왕때 좌명공신으로 상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에 올라 여량부원군에 봉해졌다 여산송씨는 송례의 손자대에 와서 크게 5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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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을 파조(派租)로 하는 |
원윤공파(元尹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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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邦英)을 파조로 하는 |
밀직공파(密直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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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元美)를 파조로 하는 |
소윤공파(少尹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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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璘)을 파조로 하는 |
지신공파(知申公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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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瑞)를 파조로 하는 |
정가공파(正嘉公派) |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개성원윤[운]의 6세손간(侃)이 형조참판을 지냈고, 후에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물러나자 고향인 여산에서 두문불출하였다. 단종이 시해되자 산 속으로 들어가 통곡하여, 김시습, 조상치, 조여, 정지산, 이성희, 이축, 엄흥도와 더불어 팔절(八節)]로 숭상받았으며, 미치광이 짓으로 여생을 마쳐 동학사의 초혼각과 운곡서원, 숙모전, 세충사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6세손건(建)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우고 성주 판관이 되었으며,뒤에 함창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했다. 예빈시 부정을 역임한극창(克昌)의 아들천희(千喜)는 성종때 형조 참판과 황해도와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세형의 손자여종(汝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따라 종군하여 한산도 싸움에서 무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으로 경상좌도 수군우후를 지냈다. 인(璘)의 6세손현수(玹壽)는 딸이 단종비(정순왕후)로책봉되자 지돈령부사에 올라 여량군에 봉해졌으며, 옛 친구인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어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의 탄핵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으나 세조의 두둔으로 무사했다가 금성대군이 사사(賜死)된 후 정창손을 비롯한 양사의 주장으로 마침내 주살되었다.
한편 공민왕때 우정승으로 여량부원군에 봉해진서(瑞)의 7세손[질]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으로 여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우의정, 영의정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특히 눈섭이 길고 코가 높은데 얼굴 모양이 찡그리는 듯하여 왕으로부터 오해를 곧잘 받았다고 한다. 질의 손자인(寅)은 중종의 딸 정순옹주와 혼인하여 여성위(礪城慰)가 되고 명종때 여성군에 봉해졌으며, 시문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으며 특히 그는 중국 오흥의 필법을 본받아 특출한 서법으로 해서(楷書)에 능했으며,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현판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을 짓고 썼다.
조선 중기의 거유익필(翼弼)은 가문의 문맥을 형성한 인물로 성리학과 예학에 통달했으며,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 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 등과 함께 [팔문장가(八文章家)]의 한 사람으롤 손꼽혔다. 익필의 형제 부필(富弼)과 한필(翰弼)도 모두 문장에 능하여 율곡은 "성리학을 말할만한 사람은 익필과 한필 형제뿐이다" 라고 극찬했다. 만년에 고양의 귀봉산 기슭에 내려간 익필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특히 사계 김장생으로 하여금 그의 학통을 잇게 하여 조선 예학의 종주(宗主)를 이루게 하였다.
선조때 동방의 비장군(飛將軍)으로 불리웠던순례(純禮)는 제주목사와 전라도 방어사를 역임 했으며, 그의 손자홍연(弘淵)은 임진왜란과 이몽학의 난에 공을세워 무명을 떨쳤다.
임진왜란때 동래성에서 순절한상현(象賢)은 여산송씨를 더욱 빛낸 인물이다. 1592년 동래부사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 수비에 앞장섰다. 임진년 4월 14일 상현은 적과 싸우기를 거듭하다가 15일 새벽에 적병이 성 뒷산으로 쏟아져 들어와 조방장 홍윤관, 우위장 조영규, 대장 송봉수, 교수 노개방 등이 모두 죽었다. 상현은 급히 조복을 가져와 갑옷위에 입고 남문루에 올라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적이 가까이 와도 꼼짝 않고 꾸짖었다. "이웃 나라 도리가 이렇단 말이냐, 우리는 너희에게 저버림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찌 이 지경이냐" 하고 신색이 변치 아니하자 화가난 적이 칼을 휘둘렀다.
상현의 아우상인(象仁)은 광해군때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풀려나 직강과 지평을 지냈으며, 한편 현감관(寬)의 아들대립(大立)은 정유재란때 흥양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그의 아우희립(希立)은 노량 싸움에서 전상을 입고 다대포 첨절제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숙종때 등과하여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역임한징은(徵慇)은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약헌집(約軒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다. 성명(成明:징은의 아들)은 예문관 제학과 공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며 문장에 능하여 저서로 송석헌집(松石軒集)을 남겼다. 아우진명(眞明)도 관찰사와 이,호,예조의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에 올랐으며, 학행과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징오(徵五)의 아들인명(寅明)은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이조판서로서 온건파를 등용하여 당쟁을 완화함으로써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밖의 인물로는 고종때 승지와 예조참의를 역임한영대(榮大)와 판관 영윤(榮潤)이 유명했으며, 주옥(柱玉)은 한말에 부패왕조의 폭정을 개탄하여 녹두장군 전봉준을 수령으로 민중시위를 열다 피체되었고,수만(秀萬)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산림 개발권을 요구하자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여 이를 철회시켰으며 을사조약 후에는 항일운동에 헌신하여,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던 양섭(良燮)과 함께 명문 여산송씨의 가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산송씨는 남한에 총 48,209 가구, 200,3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