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송(宋)씨의 방

나는 누구인가?-송씨에 관하여-

하루를 일년처럼 2006. 2. 13. 15:04

서동사

 

 

서동사는 ,

여산송씨,충강공 송간(宋侃·1405 ~ 1480)을...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1550 ~ 1598), 송심(宋諶·1590 ~ 1637), 송순례(宋純禮·1528 ~ 1597), 송희립(宋希立·1553 ~ 1623), 송건(宋建·1558 ~ 1592)과 김시습(金時習·1435 ~ 1493)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이 사우는 정조 9년(1785) 최초 건립 당시 여산송씨 송간, 송대립, 송심과 고흥유씨 유탁(1311 ~ 1371), 영광정씨 정연희(1566 ~
1635)등을 봉안하기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원래 1782년 태학유생 한덕보가 서재 송간을 주벽으로 하는 사우 건립을 발의한데서 비롯되어 흥양유생 신응택, 정효목 등의 노력으로 건립이 결정되었다. 10여년이 지난 1791년 건립당시 주역이였던 정효목 신응택의 주선으로 여산송씨, 고흥류씨, 영광정씨의 분사가 합의되었다. 정조 20년(1796) 서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다. 순조 1년(1801) 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대하여 일문 육충사로 불리었다. 순조 33년(1833) 송상보(1564 ~ 1597), 송득운(1570 ~ 1633), 송석룡(1614 ~ 1733)을 추배하였고, 헌종 12년(1846) 매월당 김시습을 봉안하였다. 1848년에는 원유들의 개호상서에 의해 「서동사」로 개칭하였고, 1868년 전국 서원훼철 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던 모양이나 이내 훼철되었다. 1956년 현위치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薺洞書院)이라 하였고 1972년에 송홍연(1569 ~ 1629), 송진부(1569 ~ 1597)를 추배하였다. 같은 경내의 창효사(1980년 건립)에는 효열을 분리하여 송석룡,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등을
배향하고 있다. 신실(神室)인 서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며, 동·서재는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이밖에 창효사, 양평문, 내·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본문

시조는 고려 때 유익()이며, 고려 충렬왕 때 중찬()을 지낸 송례()의 아들 염()·분(玢)의 형제대에서 원윤공파()·밀직공파()·소윤공파()·지신공파()·정가공파()의 5파로 갈라졌는데, 앞의 3파는 염의 아들이고 나머지 2파는 분의 아들이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2명(영의정 1명, 좌의정 1명)과 왕비 1명,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을 배출했는데, 5파 중에서도 특히 지신공파와 정가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지신공파에서는 현수()를 비롯하여 세림()·세형() 형제, 상현()·상인() 형제, 성명()·진명() 형제, 그밖에 인명()·문재() 등의 명신들이 나왔다. 현수는 단종의 국구()로서 단종복위운동 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세림은 문장·서화에 뛰어났고, 세형은 명종 때 위사공신()에 오르고, 대사헌, 호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상현은 임진왜란의 절신으로 유명하고, 상인은 인조 때 암행어사·부사·관찰사 등을 지냈다. 성명은 예조·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진명은 호조·이조·예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인명은 좌의정에 올라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으며, 문재는 관찰사·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정가공파에서는 영의정 질(), 중종의 부마 인()과 문림()·언신() 등이 나왔다. 질은 중종반정()에 정국공신()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 인은 중종의 부마가 되고 도총관()을 지냈으며, 시문과 서예에 능하였다. 문림은 성종 때 좌리공신()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언신은 병조·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 원년 관찰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한다.

원윤공파에서는 익필()이 대표적 인물이다. 선조 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이라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여산송씨의 5파 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남도 고흥(), 밀직공파는 경상북도 영덕(), 소윤공파는 전라북도 부안()·익산(), 지신공파는 전라북도 부안, 정가공파는 경기에 밀집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가구수 7만 2763가구로, 송씨의 37%를 차지한다. 

 

여산 송씨 (礪山宋氏)

 

 1> 시조 :  송유익[宋惟翊}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여산(礪山)은 전라북도 익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여량과 낭산 두현의 합명인데,
     여량현은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을 신라 경덕왕이 여량으로 고쳤다.
     낭산현은 본래 백제의 알지산현인데 경덕왕이 야산으로 고치고  고려때 낭산으로 하였으며,
     1401년(정종 3) 두현을 합하여  여산현으로 고치고 1913년 그일부지역은여산면으로 남아있다.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때 진사로 나라에 훈공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로 추밀원부사에 추증되었다.
     문헌에 의하여 그의 선계는 중국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손 자영(自英)이다.

     그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인유익(惟翊)은 여산송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천익(天翊)은 은진송씨,  막내문익(文翊)은 서산송씨의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 모든송씨의      연원을 이룬것으로 전해진다.
     은진·진천 송씨와 함께 우리나라 송씨의 가장 화려한 인맥을 이룬 여산송씨는  
     시조의 아들숙문(淑文)이 고려때 정당문학을 역임했고, 증손송례(松禮)는 충렬왕때  
     좌명공신으로 상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에 올라 여량부원군에 봉해졌다   
     여산송씨는 송례의 손자대에 와서  크게 5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이어왔다. 

 

운을 파조(派租)로 하는

원윤공파(元尹公派)

 

방영(邦英)을 파조로 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

 

원미(元美)를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인(璘)을  파조로 하는

지신공파(知申公派)

 

서(瑞)를 파조로 하는

정가공파(正嘉公派)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개성원윤[운]의 6세손간(侃)이 형조참판을 지냈고, 후에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물러나자 고향인 여산에서 두문불출하였다.
     단종이 시해되자 산 속으로 들어가 통곡하여, 김시습, 조상치, 조여, 정지산, 이성희, 이축,
     엄흥도와 더불어 팔절(八節)]로 숭상받았으며, 미치광이 짓으로 여생을 마쳐  동학사의
     초혼각과 운곡서원, 숙모전, 세충사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6세손건(建)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우고 성주 판관이 되었으며,뒤에 함창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했다.
 
     예빈시 부정을 역임한극창(克昌)의  아들천희(千喜)는 성종때 형조 참판과 황해도와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세형의 손자여종(汝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따라 종군하여 한산도 싸움에서
     무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으로 경상좌도 수군우후를 지냈다.
    인(璘)의 6세손현수(玹壽)는 딸이 단종비(정순왕후)로책봉되자 지돈령부사에 올라 여량군에
     봉해졌으며, 옛 친구인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어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의 탄핵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으나 세조의 두둔으로  
     무사했다가 금성대군이 사사(賜死)된 후 정창손을 비롯한 양사의 주장으로 마침내 주살되었다.

     한편 공민왕때 우정승으로 여량부원군에 봉해진서(瑞)의 7세손[질]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으로 여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우의정, 영의정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특히 눈섭이 길고 코가 높은데 얼굴 모양이 찡그리는 듯하여 왕으로부터 오해를 곧잘 받았다고      한다.  질의 손자인(寅)은 중종의 딸 정순옹주와 혼인하여 여성위(礪城慰)가 되고 명종때
     여성군에 봉해졌으며, 시문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으며 특히 그는 중국 오흥의 필법을 본받아
     특출한 서법으로 해서(楷書)에 능했으며,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현판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을 짓고 썼다.

     조선 중기의 거유익필(翼弼)은 가문의 문맥을 형성한 인물로 성리학과 예학에 통달했으며,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 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 등과 함께  [팔문장가(八文章家)]의
     한 사람으롤 손꼽혔다.   
     익필의 형제 부필(富弼)과 한필(翰弼)도 모두 문장에 능하여 율곡은  "성리학을 말할만한 사람은      익필과 한필 형제뿐이다" 라고 극찬했다.   만년에 고양의 귀봉산 기슭에 내려간 익필은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특히 사계 김장생으로 하여금 그의 학통을 잇게 하여 조선 예학의
     종주(宗主)를 이루게 하였다.   

     선조때 동방의 비장군(飛將軍)으로 불리웠던순례(純禮)는 제주목사와 전라도 방어사를 역임
     했으며, 그의 손자홍연(弘淵)은 임진왜란과 이몽학의 난에 공을세워 무명을 떨쳤다.

     임진왜란때 동래성에서 순절한상현(象賢)은 여산송씨를 더욱 빛낸 인물이다.
     1592년 동래부사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 수비에 앞장섰다. 임진년 4월 14일 상현은
     적과 싸우기를 거듭하다가  15일 새벽에 적병이 성 뒷산으로 쏟아져 들어와 조방장 홍윤관,
     우위장 조영규, 대장 송봉수, 교수 노개방 등이 모두 죽었다.
     상현은 급히 조복을 가져와 갑옷위에 입고 남문루에 올라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적이 가까이 와도 꼼짝 않고 꾸짖었다. "이웃  나라 도리가 이렇단 말이냐, 우리는  너희에게
     저버림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찌 이 지경이냐" 하고 신색이 변치 아니하자
     화가난 적이 칼을 휘둘렀다.

     상현의 아우상인(象仁)은 광해군때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풀려나  직강과 지평을 지냈으며,  한편 현감관(寬)의 아들대립(大立)은 정유재란때  흥양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그의 아우희립(希立)은 노량 싸움에서 전상을 입고
     다대포  첨절제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숙종때 등과하여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역임한징은(徵慇)은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약헌집(約軒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다.
     성명(成明:징은의 아들)은 예문관 제학과 공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며 문장에 능하여  
     저서로 송석헌집(松石軒集)을 남겼다.
     아우진명(眞明)도 관찰사와 이,호,예조의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에 올랐으며, 학행과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징오(徵五)의 아들인명(寅明)은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이조판서로서 온건파를 등용하여 당쟁을 완화함으로써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밖의 인물로는 고종때 승지와 예조참의를 역임한영대(榮大)와 판관 영윤(榮潤)이 유명했으며,      주옥(柱玉)은 한말에 부패왕조의 폭정을 개탄하여 녹두장군 전봉준을 수령으로 민중시위를
     열다 피체되었고,수만(秀萬)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산림  개발권을 요구하자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여 이를 철회시켰으며 을사조약 후에는  항일운동에 헌신하여,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던
     양섭(良燮)과 함께 명문 여산송씨의 가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산송씨는 남한에 총 48,209 가구,
     200,3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풍유리

     전남 고흥군 남양면 심교리

전남 보성군 노동면 옥마리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수리, 대강리

경북 칠곡군 북상면 오평동

     전남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화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