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의 역사
1. 테니스의 기원
테니스가 언제 확실하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문헌은 없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테니스의 기원은 12~13세기 프랑스에서 행해진 ‘쥬 드 뽐므(Jeu de Paume)’ 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Paume은 영어로 ‘palm’ 즉 손바닥을 뜻한다.
Jeu de Paume는 실내에서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놀이였다. 이러한 형태의 테니스를 영국에서는 ‘real
tennis’ 미국에서는 ‘court tennis’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royal tennis’ 라고 칭하고 있다.
2. 테니스의 발전
실내에서 하는 운동이던 ‘Jeu de Paume’는 16세기 말경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실외의 잔디 위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영국으로 건너간 테니스는 점차 근대 테니스의 형태로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1874년에는 윙필드(Walter Clopton Wingfield) 소령이 스페어리스틱(Sphairistike) 이라는 근데 테니스와 비슷한 형태의 테니스 룰 북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테니스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근대 형태의 테니스는 1870년 대 미국으로 전해졌다.
근대 테니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전영 크로켓 클럽(All-England Croquet Club)이 윔블던의 잔디코트를 테니스를 위해 할애한 결정이었다. 테니스의 인기가 늘자 전영 크로켓 클럽은 그 이름을 전영 크로켓, 테니스 클럽(All-England Croquet and Lawn Tennis Club)으로 바꾸고 1877년 테니스 챔피언쉽의 개최를 결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윔블던의 시작이었다.
첫 대회 우승자는 Spenser Gore 였다. 그리고 1881년 제 1회 U.S Championship 대회가 미국의 Staten
Island Cricket and Baseball Club 에서 개최되었으며 초대 우승자는 영국인인 O.E. Woodhouse 였다. 1891년에는 프랑스가 1905년에는 호주가 각각 처음으로 챔피언쉽 대회를 개최하면서 근대 테니스의 틀이 형성되어 갔다.
1960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주요 챔피언쉽 대외들이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프로들에게도 오픈되면서 테니스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70년대에 TV 매체의 방송과 더불어 많은 프로투어 대회가 생기면서 테니스를 세계 3대 메이저 스포츠 중 하나로 자리 매김 하게 했다.
3. 윔블던 (Wimbledon)
전 영국 선수권 대회(All England Tennis Championship)라는 공식적인 대회명보다 윔블던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대회이다.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전통을 중요시하고 있다. 1877년 첫 대회가 개최되었다. 처음의 윔블던은 영국 국내만의 시합이었으나 점차 외국인에게도 그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1968년에 비로소 프로들에게 오픈이 되면서 명실 공이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테니스 대회로 발전하였다.1회 대회부터 지금까지 잔디코트에서 대회가 치루 어 지고 있다.
4. 프랑스 오픈 (French Open)
파리근교 블로뉴의 롤랭개로 테니스 클럽에서 개최된다.
1891년 출범해서 1923년 까지는 프랑스 클럽 멤버의 대회로 진행되다 1925년부터 외국선수들에게 개방이 되었고 1968년부터는 프로들에게도 오픈되었다. 빨간 벽돌가루로 만든 앙투카라는 코트에서 치루 어진다.이 대회 우승자는 클레이 코트 전문가로 불릴 정도로 클레이 코트 토너먼트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5. 전미오픈 (U.S Open)
처음에는 ‘U.S National Championship’ 이라는 명칭으로 1881년 출범되었으며 1968년부터 프로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1년부터 1974년까지는 잔디에서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후 3년간은 클레이 코트에서 그리고 1978년 부터는 뉴욕의 플러싱 매도우의 내셔널 테니스 코트에서 대회가 치루 어 지고 있다.
플러싱 매도우 코트의 표면은 합성코트(통칭 : 하드코트). U.S Open의 경우 잔디, 클레이, 하드코트의 순 으로 코트의 표면이 바뀌었는 데 지미 코너스는 각기 다른 코트에서 치루어진 U.S Open에서 모두 우승한 유일한 선수이다.
6. 호주오픈(Australian Open)
호주 오픈은 1905년 처음으로 개최되어 1968년 까지는 호주의 여러 도시의 잔디코트에서 치루어 졌다.
1969년부터 프로에게 오픈이 되었으며 그 이후 멜버른에서 대회가 치루어지고 있다.
1988년 부터는 Australian National Tennis Centre의 하드코트에서 대회가 개최된다.
4대 그랜드슬램 중 역사가 가장 짧고 상금이 낮아 톱 프로들의 참가가 저조하다. 이로 인해 그랜드슬램대회 중 가장 권위가 낮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7. 데이비스컵의 역사
데이비스컵(Davis Cup)은 윔블던과 함께 고고 한 테니스의 전통을 구축한 유서 깊은 대회다.
20세기를 여는 1900년에 시작되어 100여 년간 계속되고 있는 이 국가대항전은 한 청년의 꿈으로 시작, 세계적인 스포츠행사로 인종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며 테니스 기량향상과 국제 친선의 터를 제공하였다.
당시 법적 성인에 미달, 투표권도 없었던 드와이트 데이비스 청년은 그가 기증한 700달러 상당의 은제컵이 세계 테니스 계의 왕좌를 상징하는 등 이토록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 컵은 우승국 은행금고에 보관돼 마치 보석이 줄줄이 박힌 왕관이나 되듯이 무장경관이 지키고 있다. 그 동안 세 차례 금이 가 수리를 한 이 컵은 테니스 계의 성배(聖杯)와 같은 존재다.
환희의 상징으로 축배로도 사용되는 이 컵엔 정확히 서른 일곱 병의 샴페인을 부을 수 있다고 한다.
컵의 기증자인 드와이트 필리 데이비스(Dwight P.Davis)는 세인트루이스의 유서 깊은 명문교校 이스턴 사립을 거쳐 하바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테니스에서도 뛰어나 전미선수권 복식에서 1899년부터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홀컴 우드와 짝을 이뤄 우승한 첫 해에 그는 국제대항전에 대한 아이디어의 싹을 얻었다.
데이비스는 하바드대학 테니스팀 멤버였다. 당시 하바드대학 테니스는 강팀으로서 전미 단식 챔피언 말컴 화이트만, 복식챔피언 홀컴 우드 그리고 유명한 스포츠 용구 회사 라이트 앤드 딕슨社 창설자인 조지 라이트의 아들 빌즈 라이트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빌즈 라이트는 후에 전미 단복식을 석권, 명실상부한 챔피언 팀이었다.
이들의 기량을 아끼고 그냥 파묻히는 것을 아깝게 생각한 라이트씨는 이들 4명에게 태평양 연안을 순회하는 테니스여행을 주선해 주었다. 하바드 팀은 2패를 제외하고 모두 이겼는데 이때 이미 데이비스는 동서대항전과 같은 국제대회를 구상했었다.
대항전을 할 경우에 상대로선 테니스를 처음 시작하고 자기들이 세계제일이라고 자만하는 영국이 당연하였다. 당시 영국은 베이스라인에서 수비위주의 테니스를 했으며 미국은 공격적으로 네트플레이를 감행하는 타입이었다.
또한 미국은 American Twist라고 부르는 서비스를 개발, 한번 영국과 겨뤄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데이비스는 동부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 아이디어를 발상, 뜨거운 호응을 얻어 미국 테니스 협회와 협의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처음이 아니었다. 당시 회장이었던 제임스 드와이트 박사는 전미복식에서 다섯번 우승했으며 20년 전에 테니스를 미국에 소개한 선구자 중 1인이었다. 이 드와이트 박사는 5, 6년 전부터 이런 얘기를 꺼냈으며 1897년엔 미국이 상대의 경비를 대고 초청하는 형식의 대전을 추진했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영국이 반대했는데 1898년엔 윔블던대회가 끝난 후 다시 제안이 나왔으나 미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무산되었다.
이런 이유로 드와이트 박사는 데이비스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박사가 영국 테니스 협회에 의향을 타진하자 긍정적인 대답이 왔다.
이렇게 해서 경기는 1900년 보스턴 교외의 브루크 라인에 있는 롱우드 클럽에서 열려 데이비스컵 대회는 시작되었다. 젊지만 재산가였던 데이비스는 트로피를 기증하기로 약속, 보스턴 보석상과 상담하여 컵의 디자인을 결정했다.
순은(純銀)으로 얇게 도금을 한 높이 12 인치, 구경 18 인치, 무게 217 온스의 컵이 완성되었다. 이 컵의 정식명칭은 International Challenge Trophy. 그러나 기증자의 이름을 딴 데이비스컵으로 더 유명해져 이제는 정식명칭이 되었으며 해가 거듭될수록 광채를 더하고 있다.
8. 우리나라 테니스의 발자취
우리 나라에 테니스가 들어 온 것은 80여년 전 미국의 선교사 뱅커 씨와 앤더슨 박사에 의해 서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1962년 경성제국대학 정구 부장이었던 강성태 씨가 연식정구부를 테니스 부로 전환시키면 서부터 이다.
그러나, 볼, 라켓 등 용구가 없어 별로 발전이 없었으나, 8 15 해방 후 우리 나라에 들어온 미군들의 영향으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해, 1945년에는 경식과 연식이 통합된 조선정구협회가 결성되었고, 1948년 9월에는 세계정구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그 후 1955년에 대한 테니스 협회와 대한 연식 정구 협회로 분리되었고, 1960년 4월에는 우리 나라 테니스 역사상 처음으로 데이비스컵 쟁탈 동양 예선 전에 출전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에는 처음으로 여성만의 국가 대항전인 페러데이션 컵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성적은 좋지 않았다.
1970년 이후 테니스 붐과 용구의 국산화로 말미암아 테니스 인구의 급증과 기술 향상이 나날이 달라져 서서히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출처: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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