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 수도암 전경
하룻밤의 사랑과 원한
몹시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한려수도의 절경은 시원스러웠다.
난생 처음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에 취한 홍총각은 낙방의 시름도, 다시 맞을 과거에 대한 조급함도 다 잊고 있었다.
작고 큰 포구를 따라 풍남리라는 포구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야단났군!』
다급한 홍총각은 대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의 작은 초가집으로 무조건 뛰어들었다.
『죄송하오나 잠시 비를 좀 피해 가겠습니다.』
비록 차림새는 초라하나 기골이 장대하고 수려한 미모의 총각이 들이닥치자 방 안에서 바느질하던 여인은 질겁을 하며 놀랐다.
여인은 숨을 돌리며 진정한 뒤 입을 열었다.
『나그네길인가 보온데 걱정 마시고 비가 멈출 때까지 쉬어 가십시오.』
여인의 음성은 외모만큼 고왔으나, 어딘가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홍총각은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식구들은 모두 어디 가셨나요?』
『이 집엔 저 혼자 있사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홀로 살고 있을까.
홍총각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여인은 자신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고을에서 미녀로 알려져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던 그녀의 이름은 임녀.
수없이 남의 입에 오르다 결혼을 했으나 1년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심적 충격이 컸던 그녀는 세상이 싫어져 대밭 가운데다 초당을 짓고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끝나도록 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갈 길은 먼데 이거 큰일인걸….』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홍총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추하지만 여기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지요.』
비는 오고 날은 어두우니 임녀는 나그네를 딱하게 여겨 어려운 결심을 한 것이다.
『옛부터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엌에서 하룻밤 지샐까 하오니 어서 방으로 드십시오.』
홍총각은 펄쩍 뛰었다.
한참 후 옥신각신 양보하다 결국은 한방에서 지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홍총각은 아랫목에서 임녀는 웃목에서 자기로 한 것이다.
막상 잠자리에 들었으나 두 사람 다 잠이 오질 않았다.
밖에선 세 찬 빗소리가 여전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홍총각은 임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홍총각은 참다 못해 떨리는 손을 뻗어 여인의 손을 잡았다.
『아이 망칙해라! 왜 이러세요?』
그녀는 놀라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부인, 나와 혼인해 주오. 우연히 이렇게 만나 하룻밤 지내는 것도 큰 인연이 아니겠소.』
홍총각의 목소리는 떨렸다.
『혼인을요? 그런 농담 거두십시오. 한 여자가 어찌 두 남편을 섬기겠습니까?』
여인은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총각은 대장부가 한번 뺀 칼을 다시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두고 나의 사랑을 맹세하겠소.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라 했으니 이 마음 결코 변치 않으리다.』
이렇듯 간절한 속삼임에 임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홍총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만일 당신이 나를 버리시면 이 몸은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말려 죽일 거예요.』
『어허, 공연한 걱정을 다하는구려. 날이 새면 당장 고향에 가서 혼인 채비를 해가지고 올 것이오.』
다음날 아침, 홍총각은 꽃가마로 모시러 오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길을 떠났다.
홍충각이 떠난 지 열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임녀의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이 가고 해가 바뀌었다. 홍총각의 소식은 점점 아득하기만 했다.
뒷동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먼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마침내 임녀이 마음엔 증오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의원은 「상사병」엔 백약이 무효라며 돌아갔고, 홍총각과 만난 지 꼭 1년이 되는 날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한편 고향으로 돌아온 홍총각은 임녀와의 약속은 까맣게 잊은 채 책만 열심히 읽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함평 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리고는 양가댁 규수를 아내로 맞아 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현감은 거나하게 술이 취해 잠자리에 들었다.
이 날따라 이상한 소리가 현감의 잠을 흔들어 깨웠다.
「스르륵 스르륵」그것은 커다란 구렁이가 기어드는 소리였다.
『아니 구렁이가? 게 누구 없느냐! 저 구렁이를 빨리 때려 잡아라.』
현감의 아닌 밤중 호령에 하인들이 몰려들어 현감이 자는 방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현감의 황급한 호령에 하인들은 몽둥이로 문을 부수려 했으나 이번엔 손에 쥐가 내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놈들 뭣하고 있느냐! 어서 구렁이를 때려 잡지… 아 악!』
현감은 말을 채 맺지 못한 채 비명을 질렀다.
구렁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현감의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현감은 숨이 콱콱 막히면서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이때 스산한 바람과 함께 징그러운 구렁이가 머리를 추켜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아닌가.
『여보! 나를 모르겠소?』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구렁이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나오다니.
『나는 당신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임녀입니다. 맹세를 저버리면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죽이겠다던 그날 밤을 잊으셨군요. 기다림에 지친 나는 죽어 상사뱀이 되었다오.』
『아-. 내가 지은 죄의 업보를 받는구나.』
현감은 총각 시절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탄식했다.
그날부터 밤이 깊어지면 이 상사뱀은 현감의 잠자리에 찾아왔다가 새벽녘이 되면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현감은 병든 사람처럼 누렇게 얼굴이 뜨면서 마르기 시작했다.
유명한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처방을 했으나 구렁이는 밤마다 찾아왔다.
생각다 못해 산속 깊이 살고 있는 어느 도승을 찾아가 간곡히 당부했다.
『스님, 제발 살 길을 일러주십시오.』
스님은 임녀가 살던 초당을 헐고 암자를 지은 후 크게 위령제를 올려주면 구렁이는 나타나지 않을거라고 일러줬다.
현감은 그대로 따랐다.
그 후 구렁이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암자가 바로 고흥 수도암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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