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우]548-873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41
두원면 운대리 운곡(雲谷)의 운암산(雲嵐山)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명승(名僧) 도희(道喜)가 창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영허(暎虛)가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3~4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중종(中宗) 12년(1517) 화주(化主)인 인종별좌(印宗別座)가 나한전(羅漢殿: 무루전「無漏殿」)을 건립하였다. 설암추붕이 수도암에 와서 칠언시인 모악산 수도암(募岳山 修道庵)을 지어 남겼다.
숙종 25년(1699) 설읍(雪邑)에 거주하는 신자(信者) 이공(李公)과 이란(二難) 양인이 금생(今生)에 복전(福田)을 심어 내세(來世)에 두율정토(兜率淨土)에의 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량(佛糧)을 시납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후기의 수도암은 미륵신앙 도장의 기능을 했던 사찰로 보인다. 불량을 기진(寄進)한 양인은 이 절의 해잠, 영허대사(海岑,映虛大師)의 친족이었다.
영허당은 이공과 이란의 불량시납(佛糧施納)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놓기 위해 승(僧) 혜현(慧玄)에게 흥양모악산 중흥사 수도암 불량기(興陽募岳山 中興寺修道庵佛糧記)를 짓게 하였다. 또한 철종 11년(1860) 3월에 아미타(阿彌陀) 삼존정화(三尊幀畵)가 조성되어 봉안되었다. 1933년경에는 리산 최유일(彖山 崔裕一)이 주지직을 맡았는데, 그 이후로 사찰면모를 새롭게 꾸미게 되었다. 최유일은 수도암이 조선 후기에 미륵 신앙도장이었던 점에 유의하여 지방민에게 미륵신앙을 불어넣은 것으로 여겨진다. 1935년 두원면 용반리에 거주하는 박재빈(朴在彬)이 토지 1두락을 기증했다. 박재빈의 셋째 아들 형(炯)의 어린애가 1934년에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이를 애석하게 여겨 땅 1두락을 절에 맡겨 향촉지비(香燭之費)의 재용(齋用)으로 사용케 함으로써 추천도장(追薦道場)으로 삼았다.
1939년 정제(庭除)가 허물어져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자 절 인근의 5개 마을 사람들이 정제보축을 하였다. 1947년 주지직을 계속하여 맡아보던 최유일이 수도암사적비(修道庵事蹟碑)를 건립했으며 1948년에는 수도암사적비기념운(修道庵事蹟碑紀念韻)을 지어 현판으로 걸어 놓기도 하였다. 1952년에는 고흥군의 김상익(金相翊)이 토지 3두락을 기진하였으며, 1971년에는 범종불사(梵鐘佛事)를 하였다. 최근에는 주지직을 맡아오던 최유일이 입적(入寂)하자 대종사 리산 최유일 기념비(大宗師 彖山 崔裕一紀念碑)>를 건립하였다.
교통안내
o 도로정보
호남고속도로 주암 IC(27번 국도), 남해고속도로 순천IC(17,2번 국도) - 벌교(15,27번 국도) - 운대교차로 진출 - 200m 남쪽 굴다리 - 중대, 석촌, 운곡마을 - 수도암(운대교차로에서 5.3km)
<고흥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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